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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Aug 09. 2020

그 새는 왜 죽었을까

"혹시 또 새가 죽어 있는 건 아니겠지?"


닷새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딸아이가 물었다.

"뭐라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어리둥절해하는 동시에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말았다.


작년 여름, 아이들과 여행을 갔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묵은 먼지를 털고 환기를 시키려고 거실 현관문을 열었다가 뒤뜰 화단에서 죽은 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처음 있는 일에 무척 당황한 남편과 나는 혹시 아이들이 볼까 봐 일단은 얼른 새를 치웠다. 그러나 문제는 집 안에 있었다. 새는 자신이 한동안 우리 집에 머물렀던 흔적을 거실 여기저기, 특히 딸아이의 방 창틀과 침대 위에 뚜렷이 남겨 두었다. 


남편은 재빨리 주인을 대신하여 우리 집을 관리하고 있는 잭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은, 우리가 여행 간 사이 그가 집의 지붕을 손보려고 일하는 사람을 데려왔었다는 문자를 익히 받은 터라, 잭이라면 이 사태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우리 집에 들어왔을 때 이미 새 한 마리가 집 안에서 죽어 있었다고 했다. 급한 마음에 일단 화단에 치워놨는데, 우리 아이들이 볼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가끔씩 굴뚝을 통해 벽난로로 새가 들어오는 일이 종종 있다고 별 거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가 알기에 굴뚝은 촘촘한 그물망으로 막혀있어서 바람과 연기만 오가는 줄 알았는데 새가 들어왔다니 황당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아일랜드 현지인이 그렇다니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찜찜한 미스터리를 남긴 채 새에 대한 기억이 옅어져 가는가 했는데, 딸아이는 용케 그 일을 다시 떠올린 것이다.

"설마 그런 일이 또 있지는 않을 거야. 이번에는 엄마가 벽난로 입구를 종이로 막아놨잖아."

집에 도착해 짐을 거실로 옮기느라 정신이 없는데, 갑자기 남편이 낮은 목소리로 나를 다급히 불렀다. 혹시나 하고 가보니 세상에, 이번에도 작은 새 한 마리가 거실에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뒤뜰로 이어진 커다란 유리문 안에 가만히 누워있는 새를 본 아들 녀석과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다행히 이 사태를 정확히 예견했던 딸아이는 어느새 밖에 나가 친구들과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편은 일단 제일 먼저 집안의 모든 창문과 새가 들어올만한 구멍을 체크했지만 매의 눈으로 살펴봐도 그런 틈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굴뚝일까? 지난겨울부터 종이로 입구를 막아놓은 벽난로로 새가 드나들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더욱 이상한 것은 이번에는 집안 어느 곳에도 새의 분비물이나 깃털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죽은 새를 누군가가 딱 떨어트려 놓고 간 것처럼 주변은 깨끗했다.


이름 모를 새의 죽음은 작년보다 더 알 수 없는 미스터리를 남긴 채 또다시 기억 저 편으로 묻어둬야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자려고 누우면 죽은 새의 잔상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대체 그 새는 어디로 들어온 것일까?

그리고 왜 죽었을까?


다른 무엇보다도 나는 새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필이면 우리 집에서 그 작은 새들이 죽어야만 했는지 수수께끼를 풀고만 싶었다. 좁은 새장에서 잘 살아가는 새들도 있고, 동물원의 실내 조류장에서 지내는 새들을 본 적도 있다. 우리 집이 그렇게 좁은 공간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우리가 돌아오기 전에 그 새들은 죽어버렸을까. 반려조처럼 길들여지지 않아서? 배가 고파서? 아니면 어딘가에 부딪친 걸까?


꽤 여러 밤을 새에 대한 생각에 갇혀 지내다 보니 어느새 나는 그 새에 빙의한 것만 같았다. 집 안에 갇힌 새가 나인지, 내 마음속에 새가 갇힌 것인지, 어지럽게 빙빙 돌다가 점점 지쳐갔다. 거실 바닥에 가만히 누워있던 새처럼 눈을 감고 이제 그만 포기하자 맘을 먹었을 때 그제야 희미하게 무언가가 떠올랐다.


나갈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구나


더 이상은,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맘껏 날거나, 나무 이파리를 간질이며 이름 모를 열매를 쪼아 먹고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재잘거릴 수 없다는 것을, 유리 안에 갇힌 너는 알아버렸구나.


결코 다시는 새답게 살 수 없다는 절망이 너를 죽게 했구나.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다가오면서 남편과 이런저런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 늘고 있다. 돌아가면 무엇을 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고, 아이들이 다 커버리고 갱년기까지 찾아오면 그 허무함의 무게를 감당 못 할 것 같다는 나의 진지한 고백에 남편은 적잖이 놀라는 것 같았다.

그가 기억하는 나는 누구보다 사회생활을 잘하고, 집에 있을 때보다 밖에서 무언가를 하고 온 날이면 얼굴에 생기가 돌고, 혼자 있을 때보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더 행복해 보이는 그런 사람이라 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지금부터 찾아보면 좋겠다고 진중히 조언하는 그는 마치 나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졌다. 직장에서 일을 하며 지낸 시간보다 엄마와 아내, 가정주부로 살아온 시간이 어느새 더 길어지고 있다. 반짝이는 재능이 무엇이었는지, 무얼 할 때 제일 신이 나고 기뻤는지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때가 되면 밥을 짓고, 다 먹으면 그릇들을 씻고, 지저분해지면 청소를 한다. 쌓인 빨래를 돌리고, 널고, 걷고 개는 일상의 반복.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하고 있지만, 누구도 매일 하고 싶지만은 않을 그런 일. 며칠 안 하면 금세 티가 나고, 아무리 해도 좀처럼 늘지 않는데도 어쩌다 보니 가장 잘하게 되어버린 일.


내게도 다른 재능이 있었을까, 무언가를 향한 뜨겁고 집요한 열정이 있었을까?


글을 쓰는 직업을 오랜 시간 가졌지만, 정작 나만의 문체로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정색하고 쓴 적은 없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그런 직업적인 글마저도 쓸 기회를 놓쳐버렸고,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에 사진과 함께 올리는 소소한 이야기로 가끔씩  숨을 내쉬는 것이 전부였다.

한국에서 지낼 때 아주 사적이면서도 흥미로운 글쓰기 모임을 가졌던 적이 있는데,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자기만의 에세이를 쓰기도 하고, 짧은 단편소설을 써와서 글쓴이들과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마감을 못 지킨다고 잘리는 것도 아니고, 잘 썼다고 따로 상을 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몇 날 며칠을 무언가에 골똘히 집중하고 아이들을 재운 후 밤을 새우며 끄적거리던 짧은 그 시간들이 돌아보면 참 행복했던 것 같다.


더블린에 온 후 눈앞에 놓인 일들을 해결하고,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갖추느라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사이에도 이따금씩 무엇이든 끄적거리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들곤 했다. 그저 헛헛한 나를 달래려고 시작한 수줍은 글쓰기가 가끔은 정말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쓸모없고 허황된 소리 같아서 쓰면서도 누군가의 눈치가 보이고, 쓰지 않으면 않는 대로 또 불안함이 나를 사로잡았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자꾸만 우선순위에서 밀어내며 지내고 있는 나는 행복한가? 아무도 나에게 그러라고 강요한 적이 없는데, 왜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일에는 점점 무기력하고 게을러진 걸까. 그러면서도 탓할 이유를 정작 밖에서만 찾으려하고, 감당할 수 없는 화가 모이면 신세 한탄을 늘어놓곤 하는 엄마를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해줄까. 아이들에게 각인된 내가 결코 나답지 않은 모습일까봐 제일 두렵다내게 글쓰기는 그 불안과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어서 얼굴을 가리고 털어놓는 비겁한 고해성사인 셈이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새를 죽였을까.

이제는 무얼 해도 예전만큼 잘할 수는 없겠지, 더 이상은 날 수 없겠지, 하는 생각 속에 갇혀서 열정조차 뿜어내지 못하고 제풀에 절망해버린 새가 얼마나 될까.

아니다. 만일 그 새들이 죽어갔다면 마지막 퍼덕이는 날갯짓이라도 분명 알아차렸을 텐데, 무뎌진 나는 내 안에서 어떤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쩌면 그 새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얌전히 길들여져 새장 속에 우두커니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새가 죽어간 이유를 알기 위해 고민하는 여러 밤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가장 나다운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아직 그 새가 죽지 않았다는 희미한 신호를 느끼고 싶고, 아직까지 나를 퍼덕이게 하는 뜨거운 이유를 알아내 그 새를 다시 살려내고 싶었다. 목적도 이유도 없이 그냥 쓰고 싶은 이 작은 날갯짓마저 언젠가는 지치게 될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언제쯤이면 스스로 새장 속에 가둬둔 새들을 하나씩 풀어줄 수 있는 용기가 생길까. 너무 오랜만이라 서툴기만 한 날갯짓으로 작은 나뭇가지 위라도 날아오를 수 있을 때, 자유롭게  맘껏 재잘거리는 새들의 노래가 울려 퍼질 때 아마도 가장 나다운 모습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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