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있음의 신학과 철학
종교(宗敎)를 다시 생각한다.
‘종교’는 무력하고 불안한 우리를 위로한다. 죽어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우리를 위로한다. 천국에 갈 것이라면서 말이다. 사악한 힘 없이 무력한 우리를 위로한다. 최후 심판의 날에 그들은 지옥에 갈 것이라면서 말이다. 힘겹고 외로운 삶을 위로한다. 항상 신이 품고 있다면서 말이다. 그 위로 속에서 무력하고 불안한 우리를 위로를 받는다.
불안은 우리의 피하기 힘든 처지(處地)다. 돈이 많아도 불안하다. 오히려 누리고 있는 것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더 깊을 수도 있다. 물론 돈이 없어도 불안하다. 이대로 이렇게 힘든 삶만 이어질까 하는 불안이 더 깊을 수도 있다. 하여간 저마다의 처지에 저마다의 모양으로 불안은 사라지지 않고 깊어진다. 그 불안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일상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론 그 불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초자연’을 찾는다. 그치고 그 초자연의 힘으로 자신을 안내하는 종교는 힘을 가진다. ‘불안’이란 ‘거름’에 ‘종교’는 거대해진다. 눈에 보이는 종교 건축물과 이런저런 감각적 상징들이 거대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도 종교가 지배한다. 신이 자신의 삶을 이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잘 되면 신의 뜻에 따라 잘 산 것이고, 실패하면 신의 뜻을 거스른 자신의 잘못이다. 잘되면 신의 탓이고, 못되면 자신의 탓이다. 어찌 되던 자신은 수동적인 존재다. 신 앞에 무력하게 흔들리는 존재다. 내가 사라진 존재, 신만이 주인인 존재, 그러나 사실 신을 대신해 종교인이 사라진 나라는 주체, 그 자리에 들어와 주인이 되어 있다.
불안을 굳이 초자연적 위로로 극복해야 하는 걸까? 불안을 굳이 초자연적인 그 무엇으로부터 위로를 받아야만 하는 걸까? 그리고 그 불안을 위로하는 신은 나를 떠난 저 멀리 있는 존재이거나 나와 가까이 있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모습으로 있어야만 하는 걸까? 굳이 성직자와 목회자 그리고 무속인이 알려 주어야만 알 수 있는 그러한 모습으로 있어야만 하는 걸까? 그들의 언어 속 신은 대체로 초자연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신은 자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모습으로 있을지 모른다. 불안을 위로하는 신 역시 자연의 모습으로 우리의 모습으로 있을지 모른다. 불안한 나와 너의 그 아픔은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고 안아주는 그 자연스러운 더불어 있음의 모습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여기를 벗어난 저기 저 신의 위로나 나와 함께 있다지만 느끼지 못하는 신의 위로가 아닌 일상의 소소하지만 고마운 그 작은 ‘자기 내어줌’으로 더불어 있는 우리 됨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신은 바로 그 더불어 있음은 아닐까 싶다. 신은 저기 저 초월의 어딘가에서 종교인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혹은 이 현실을 떠난 조용한 고독의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끄럽게 울고 웃으며 서로를 안아주며 서로 다른 생각으로 살아도 더불어 울고 웃는 바로 여기 우리 가운데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신이 바로 여기 우리 가운데 있다면, 우리의 종교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종교를 초자연의 영역으로 내밀지 말았으면 한다. 신의 자리를 지금 여기의 밖이라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신을 기존 종교의 언어, 즉 초월의 언어 속에 구속하지 않았으면 한다. 신과 나 사이 어떤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신을 어떤 예식 속에서만 만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2022년 6월 26일
유대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