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다시 생각해 본다.

더불어 있음의 신학과 철학

by 유대칠 자까

'신'을 다시 생각해 본다.


저기 저 ‘돌’과 여기 ‘나’, 어쩌면 이 둘은 신 가운데 하나다. 내가 저 ‘돌’보다 더 위대할까? 더 신성할까? 내가 저 ‘돌’보다 우주의 신비에 더 가까운 존재일까? 비록 내가 가진 ‘의식(意識)’을 저 ‘돌’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것이 나의 신성함과 나의 우월함을 말하는 것일까? 의식이 없다 하여 그 돌은 주체가 아닌 그저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일까? 그 의식이 무엇이라고 말이다. 때론 그 의식의 밖 몸도 나란 주체성의 밖에 있는 대상일 뿐이라고도 한다. 오직 나의 영혼 혹은 이성만이 주체란 말이다. 그것만이 의식의 주체이기에 말이다. 그리고 그 의식의 주체인 영혼은 영원하다고 믿는다. 몸이 아니니 몸이 죽어도 그것은 죽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그렇게 몸이 죽어 몸을 떠난 영혼의 자리를 위해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우리 눈에 돌은 그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안을 세밀하게 보면, 그 가운데 여러 물리적 역동성이 살아 있다. 우리의 뇌도 또 다른 방식의 물리적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물리적 역동성으로 우리는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즉 그 뇌의 물리적 역동성으로 우린 생각한다는 말이다. 다르게 보면 ‘생각’ 혹은 ‘의식’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혹은 물리적인 거다. 돌 가운데 일어나는 물리적 역동성과 방식이 다를 뿐, 결국은 하나 같이 물리적 역동성이다. 초자연적인 건 없단 말이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유물론(唯物論)’이라 한다. 그리고 종종 ‘무신론(無神論)’이라고도 한다.


우주 모든 게 결국 물리적 역동성일 뿐이라면, 우주 모든 게 아주 복잡한 물리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된다면, 그래서 창조의 신비도 종말의 신비도 영생과 부활의 신비도 없이 모든 게 결국 물리적일 뿐이라면, 한마디로 철저한 ‘유물론’뿐이라면, 무신론인가? 하나는 확실하다. 그렇게 된다면, 나의 몸이 죽으면 나는 사라진다. 천국을 가지도 않고 지옥을 가지도 없고, 그냥 사라진다. 나 두개골 가운데 뇌가 사라지는 순간, 나란 존재의 의식도 아니고, 나도 사라진다. 이렇게 천국도 지옥도 가지 않고 나란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고 한다면, 이는 오직 무신론일 뿐인가?


‘신’은 그저 우주의 창조주이고, 천국과 지옥을 심판하는 존재일 뿐인가? ‘신’은 사람을 죄에서 구하는 구원자일 뿐인가? 사실 이런 표현 자체가 물리적 현상에 기반한 표현이다. ‘창조’라는 말도 ‘심판자’란 말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기반한 표현이다. 사람의 사고 속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끼리 이 말을 사용하면 그 말이 무엇이 의미하는지 큰 고민 없이 알아듣는다. 우리 일상의 물리적 경험들에서 어렵지 않게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면 신은 물리적 우주 그 자체일 수 있다. 신은 물리적 우주의 밖이 아니라, 물리적 우주 바로 그 자체이며, 그 내면의 역동성일 수 있다. 신은 저기 저 ‘돌’과 여기 ‘나’라는 물리적 존재, 그 존재 자체일 수 있다. 우주 존재 전체, 그 전체 자체일 수 있다. 의식이 있다고 신에게 더 가까운 것도 아니고, 의식이 없다고 신에게 더 먼 것도 아닐 수 있다.


신은 가장 완전한 무엇으로 여기의 밖 저기 저 높은 곳에 있지 않을 수 있다. 신은 모두가 바라는 행복 그 자체로 저기 저 밖 높디높은 곳에 있지 않을 수 있다. 역사 속 온갖 신학자가 생각한 그런 모양으로 있지 않을 수 있다. 신은 저 밖이 아니라, 바로 여기 돌이고, 바로 여기 잡초이고, 바로 여기 나이고, 바로 여기 나의 땀이고, 바로 여기 이 먼지이고, 바로 여기 이 배설물이며, 바로 여기 이 욕망이며, 바로 여기 이 숨이고. 바로 여기 이 진흙일 수도 있다. 신은 이런저런 고상하고 추상적인 언어의 밖, 일상을 벗어난 신성하고 초월을 향한 찬양의 언어, 그 언어의 밖, 바로 여기 돌 부서지는 소리, 바람에 날리는 나무 소리, 여기저기 싸우는 소리, 여기저기 웃는 소리, 여기저기 우는 소리, 여기저기 숨소리, 여기저기 모든 존재의 소리일 수 있다.


그렇다면, 더는 억울해서 이렇게 살지 못하겠다는 그 분노의 울부짖음, 살겠다는 그 외침이 신의 가장 선명한 외침일 수 있고, 오염으로 파괴되는 자연의 무너짐이 가장 뚜렷한 신의 고난일 수 있다. 이런저런 고상한 언어에 숨은 몇몇 사람만 겨우 알아듣는 신의 계시보다 바로 이것이 신의 외침이고 신의 뜻일 수 있다.


2022년 6월 18일

유대칠 씀


유대칠

<대한민국철학사>와 <신성한 모독자> 그리고 <일반 형이상학 입문> 등의 저자이며, 라틴어로 쓰인 니콜라우스 쿠사누스의 <감추어 계신 하느님에 대한 대화>를 한국어로 번역한 역자이기도 하다. 광주 시민자유대학에서 중세 철학과 고전을 강의했으며, 경향신문의 시민대학에서 중세철학을 강의했다. 또 청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부모를 위한 철학을 강의했으며, 대구 소방본부에서 논리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대학에서 10여 년간 글쓰기와 인문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한국방송 인문학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기도 하였고, 경향신문과 한겨례 등에 철학자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철학사와 고전 그리고 고전어를 토마스철학학교 오캄연구소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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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1_121613.jpg 주왕산 사찰에서 유대칠 2022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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