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있음의 신학과 철학
‘경전(經典)’을 다시 생각해 본다.
금호강을 따라 걷는다. 화단에 자라는 해바라기와 옥수수를 바라본다. 화단을 가꾸다 흐르는 땀을 마주한다. 나를 걱정하고 응원하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 이 모든 순간에 나는 신을 느낀다. 그것은 어떤 ‘초자연적인 무엇’이 아니다. ‘기적’도 아니다. ‘신비’라 부를 거창한 무엇도 아니다. 그냥 ‘일상’의 순간이다. 금호강을 따라 걷으며 뛰는 내 심장을 느낀다. 너무 사소한 그 일상의 순간에 나는 나란 존재를 느낀다. 나의 생명을 느낀다. 그 생명에서 나는 신의 살아있음도 함께 느낀다. 화단에 자라는 해바라기와 옥수수를 바라본다. 태양을 향한 그들의 애씀과 흙과 물의 애씀 그리고 태양의 애씀과 나의 애씀을 마주한다. 태양은 그 존재만으로 애쓰고 있고 흙과 물도 그 존재만으로 애쓰고 있다. 애쓰지 않고 그리 있어도 타자를 위해 애쓰고 있다. 더불어 있으며 홀로 있다. 홀로 있으며 더불어 있다. 홀로 나를 위한 애씀이 곧 더불어 있음을 위한 애씀인 그런 애씀이다. 그 애씀에서 나는 신을 마주한다. 신의 존재를 느낀다. 어쩌면 신은 우리네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구체적 무엇이 아니라, 바로 더불어 있음의 애씀으로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소원을 들어주고 누군가의 권력과 신성함의 배경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온 우주 존재를 가득 채우는 더불어 애씀이 신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신을 만나기 위해 『경전』을 읽고, 그 『경전』의 풀이를 들었다. 신에게 더 가까운 누군가. 더 성스러운 일을 하는 누군가, 그런 누군가가 신이 한 그 말을 풀이했다. 그 많은 글 가운데 어떻게 저 글들만이 『경전』이란 이름으로 모였고, 그 기준은 누구의 것이고, 그 기준을 정한 이의 그 권위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따져 물으면 모두가 ‘신’이다. 신의 계시는 누군가 받은 것이고, 신의 선택을 받은 그들에게 계시로 신의 생각을 전한 것이고, 계시로 무엇이 신의 말인지 고를 수 있게 했단 말이다. 그 특별한 지위의 누군가, 신의 선택을 받고, 신에게 더 가까운 그들은 곧 신을 대신한 절대 권위였다. 그리고 그들의 해석으로 신을 마주했고, 그들이 신을 만나란 곳은 『경전』이었다. 글로 된 『경전』을 공부하며 서로 다른 생각들이 다투었다. 저마다의 신학자들은 ‘자기 생각 속 신’ 혹은 ‘자기 생각 속 신을 향한 여정’만을 고집하며 자기 생각 밖의 열심을 ‘이단(異端)’이라며 싸웠다. 그리고 자기 생각이 답인 이유를 역시나 신에게 돌렸다. 그것이 신의 뜻이고 그것이 신의 뜻을 담은 『경전』의 참된 내용이라면서 말이다. 신을 꼭 『경전』에서만 만나야 할까?
참된 신은 사람의 말에 구속되지 않을 거다. 사람의 말에 구속된 모든 것은 사람의 생각에 구속된 존재이고, 사람의 생각에 구속된 모든 존재는 사람의 욕심과 무관하기 힘들다. 그러니 자기 욕심의 관점에서 신을 만나려 하고, 그 관점에서 신을 향한 여정을 궁리하고, 그것만이 정답이라 고집하며 그 밖은 이단이라 밀어낸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의 답만이 자신을 천국이나 극락으로 이끌 답이란 자기 욕심이고 그 욕심에 근거한 자기 합리화이며, 결국 그 모든 것 속에서 신을 만나지 못하는 것일지 모른다. 신은 글의 밖에 있다. 글만이 신이라면, 그 신은 우리네 생각과 욕심이 종속되어 버린다.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 나에게 상을 주고 남에게 벌을 주는 존재가 아닌, 해바라기와 옥수수의 애씀에서 만날 수 있는 그 더불어 있음의 애씀, 태양과 흙 그리고 물과 나의 애씀, 그 모든 애씀의 더불어 있음, 바로 그 애씀과 하나 될 때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신은 글공부로 알아가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일상의 소소한 자기 내어줌의 애씀, 그 가운데 경험해야 하는 존재, 결국 우리 자신이 신의 몸짓이 되고 그의 애씀이 되어야 하는 바로 그러한 존재가 아닐까 싶다.
유대칠 씀
2022년 6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