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超越)’을 다시 생각한다.

더불어 있음의 신학과 철학

by 유대칠 자까

‘초월(超越)’을 다시 생각한다.


신을 흔히 초월적이라 한다. 초월이란 말은 지금 여기 한정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그보다 더 큰 초월은 지금 여기를 포함한 그 큰 무엇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흔히 ‘초월(超越)’은 자연을 넘어선 어떤 ‘초자연(超自然)’을 연상하게 한다. 지금 여기를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며 그를 넘어선 어떤 것도 사실 초자연이다. 자연이란 항상 지금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를 산다. 자연은 지금 여기 밖을 살지 않는다. 해바라기는 미래를 살지 않고 엄밀히 미래를 궁리하며 살지도 않는다. 그냥 해바라기는 지금에 충실하다. 기계적으로 말이다. 그 충실함에 해바라기는 힘들어도 온 힘을 다해 해바라기로 있을 거다. 아무리 힘겨운 조건이라도 말이다. 설령 죽어 버릴 뜨거움이나 건조함이라도 마지막까지 그냥 그 순간 해바라기로 충실할 뿐이다. 자연은 아무것 아닌 것 같은 순간에도 사실 온 힘으로 그 순간을 산다. 그게 자연이다.

자연은 사라질 때 사라지고 생길 때 생긴다. 이 흐름을 막을 수 없다. 어떤 자연의 가족도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고 항상 생기고 사라진다. 초자연은 그렇지 않다. 생기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영원의 모습을 가진다. 영원의 모습을 가진다는 것은 자연의 밖에 있단 말이다. 자연의 밖에서 자연 모두를 지배하는 힘을 가진 존재로 신을 상상한다. 그런 초월의 신을 상상한다.


그 초월의 신은 자연에선 있을 수 없는 기적으로 자신에게 큰 복을 줄 존재로 상상되기도 한다. 그러니 그 신에게 많은 것을 바치거나, 그 신의 대리인에게 많은 것을 바치거나, 그 신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나 모임에 많은 것을 바친다. 결국 그 초자연적인 힘으로 자신에게 복을 주거나 자신의 사후(死後)를 기억해 달란 거다.


나는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 나에게 신은 초자연의 공간에 있으면서 기적의 힘으로 나에게 복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나에게 신은 초자연의 공간에 있으면서 나를 사후에 그 초자연의 공간으로 부를 그런 존재도 아니다. 나에게 신은 누군가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존재도 아니다. 나에게 신은 초자연의 공간에 있는 존재도 아니고 초자연의 존재도 아니다. 나에게 신은 자연이다. 그 자연은 어떤 난해한 철학적 담론이 녹아든 그런 존재가 아니다. 신은 생기고 죽는 우리의 모습 그 자체다. 신은 생기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존재가 아니다. 신은 생기고 죽는 우리의 모습이다. 내의 태어남과 나의 사라짐이란 자연스러움, 그 자연스러운 모든 게 신이다. 저 개미가 덜 신이고 여기 사람이 더 신이고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신에 더 가깝다는 사람의 고집이다. 신은 지금 여기 모든 존재다. 저기 저 개미도 신이고 저기 저 흐르는 강물도 그 강물의 작은 물결도 모두 하나하나가 다 신이다. 매미의 소리도 신이고 내 앞의 컵도 그 컵 안의 녹차도 모두 신이다. 신 안에 모든 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모두 신이고, 그 신이 그대로 모두다. 그 부분 모두가 신이고 그로 인해 그 전체가 다 신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말이다. 그 신은 매 순간 죽고 매 순간 태어난다. 이를 막아 영원을 주는 신이 아니라, 매 순간 죽고 매 순간 태어나는 모든 몸짓, 바로 그 자연 그대로의 자연 자체가 있는 그대로의 신이다.


초월적 신이 아니라, 초자연의 신이 아니라, 나에게 신은 있는 그대로의 바로 자연이고, 그 신은 바로 나이며 너이고, 자기 존재를 위해 지금 여기 온 힘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유대칠 씀

2022년 7월 18일



20220629_182434.jpg 2022년 나의 집 화단 유대칠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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