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주간 12월 4일
“그러자 곧 그들은 그물은 두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마르코 1장 18절
‘보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보아야 하는 것’을 보는 게 ‘신앙’의 시작입니다. ‘보이는 것’에 온 마음을 빼앗기면 ‘보아야 하는 것’을 놓치게 됩니다. ‘보아야 하는 것’이 내 삶의 중심이 될 때, 신앙은 신앙이 됩니다. 보이는 삶이 아니라, 보아야 하는 삶을 궁리하며, 매 순간 나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보아야 하는 내 모습을 살피며 살아가는 게 신앙의 삶입니다.
신앙은 그물을 두고 그분을 따르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그물을 두고, 눈에 보이는 그분을 따르는 걸 신앙이라 부를 순 없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인형이라도 인형은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너무나 똑같이 생겨서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라도 인형은 사람이 아닙니다. 보이는 게에 속아 다가가 말을 거는 순간, 그저 사람으로 보이는 인형일 뿐 인형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런 인형과 같은 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그물을 두고 눈에 보이는 그분을 따라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조금도 그렇지 않은 이들이 많습니다.
성직자나 목회자 혹은 수도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저 눈에 보이는 그물을 두고, 눈에 보이는 그분을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은 이들이 많습니다. 오랜 시간 종교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괴롭혔습니까. 사람으로 치자면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습니까. 왜 나쁜 사람이 되었을까요? 홀로 하느님에게 더 가깝다는 아집, 나의 신앙만이 유일한 정답이란 아집, 이런저런 아집, 바로 홀로 있겠다는 아집 때문입니다. 그 아집이 신앙의 언어로 치장되면 나쁜 짓도 나쁜 짓으로 보이지 않고 하느님의 일이라도 되는 듯이 보입니다. 그렇게 보이지만 보아야 하는 모습을 보면 조금도 하느님의 일이 아님을 아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물을 두고 그분을 따르는 삶은 홀로 잘 사려는 마음을 두고 모두가 더불어 잘 사려는 마음으로 살아감입니다. 보이는 삶이 아닌 보아야 하는 삶을 위해 매 순간 궁리하며 살아감입니다. 보이는 삶은 쉽습니다. 남의 시선에 따라 움직이면 됩니다. 이렇게 살면 하느님이 더 기뻐하신다고 하면 그렇게 살면 되고, 또 저렇게 살면 하느님에게 더 가까워진다고 하면 또 그렇게 살면 됩니다. 궁리하지 않고 그저 따르면 됩니다. 그러나 보아야 하는 삶은 어렵습니다. 매번 궁리하고 궁리해야 합니다. 어느 것이 더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인지 궁리하고 또 궁리해야 합니다. 처한 상황마다 더불어 살아감의 방법은 다를 것이기에 그때마다 이기심을 내려 두고 궁리하고 궁리해야 합니다. 그러니 신앙의 삶은 쉬운 삶이 아니라, 참 어려운 삶입니다.
그물을 두고 그분을 따르는 삶은 어렵고 힘든 삶입니다. 매 순간 홀로 더 높아지고 더 강해지려는 나쁜 마음을 돌아보며 어찌하면 더불어 더 잘 살 것인가를 궁리하고 실천하는 그런 삶입니다. 궁리함 없이 그저 배운 지식은 실천이 되지 않습니다. 비록 실수해도 쉼 없이 주체적으로 궁리하고 또 실천하는 삶, 그런 구체적인 궁리함이 가득한 삶, 보이는 삶보다 보아야 하는 삶, 그 삶의 이름이 어쩌면 신앙입니다.
대림 주간, 그런 신앙을 돌아봅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