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주간 12월 4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이가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십니다.”
마르코 4장 35절
‘아집(我執)’, “나는 나다”, 그 차가운 외침엔 나 이외 다른 게 없습니다. 오직 나뿐입니다. 나만을 위해 삽니다. 나만이 홀로 나를 위해 삽니다. 나 이외 다른 모든 건 그저 나에게 주어진 도구일 뿐입니다. 만나서 적당히 사용하다 더는 필요 없으면 버리는 도구일 뿐입니다. 나의 홀로 좋음을 위해 이 세상 모든 건 그렇게 도구일 뿐입니다. 나 이외 누군가의 아픔을 돌아볼 시간도 없습니다. 그 시간에 더 빨리 앞으로 달려가 더 철저하게 홀로 더 좋아야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그렇게 홀로 미치도록 더 좋아지기 위해 살지만, 더 좋아지지 않습니다. 더 깊은 외로움에 빠져 살게 됩니다. 자신의 그 큰 기쁨도 철저히 외로울 때는 그저 아픈 기쁨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이는 아집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이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이는 어떤 초자연적인 기적을 홀로 독점하는 이가 아닙니다. 홀로 신에게 더 가깝다는 권위를 자랑하는 이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이는 오직 자기만 정답이고 오직 자기만 더 하느님에게 가깝다는 아집, 그 아집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이입니다. 그 아집에서 벗어나면 진짜가 보입니다. 나만의 구원을 위해 살아가다 보지 못한 이들의 눈물이 보입니다. 나만의 완덕을 위해 살아가다 보지 못한 이 세상의 부조리가 보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봤지만, 보이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아집에서 벗어나면 말입니다. 그렇게 아집에서 벗어나면, 남이 없습니다. 같은 성당과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같은 사상으로 살아가지 않아도, 같은 학벌이 아니라도, 조금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더불어 있습니다. 남이 아닌 우리로 있습니다. 아집이 사라진 자리에 나와 남은 무경계로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 서로 다른 여럿이지만,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것을 정말 제대로 보면 이런저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하나 되어 있는 따스한 하나입니다. 그 하나는 하나의 종교와 철학으로 강제된 차가운 하나가 아니라, 서로 달라도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 따스한 하나입니다.
내 형제자매와 우리 편이 되어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아집을 내려 놓은 모두가 우리가 되어 살아가는 세상, 바로 이런 세상이 천국이 아닐까요.
사랑은 같은 편끼리 모이는 집단이기심이 아닙니다. 사랑은 나와 너무나 다른 그를 향한 마음, 그 차이조차 극복하는 이타적인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는 과연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는 이들일까요? 대림 주간, 예수를 기다리며 생각해 봅니다. 이 땅, 우리의 벗으로 온 예수의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일까? 남을 향한 기다림과 다가감의 사랑일까? 우리편이 되어야 품어주는 그런 사랑일까?
이슬람 사원을 저주하며 예수의 사랑을 소리치는 이들의 외침이 참 아프게 들립니다. 아집을 놓지 못하고 오직 하느님에게 자기 소원을 기도하는 이의 그 기도도 서글프게 들립니다. 아집, 그것을 내려놓으면, 이슬람의 형제자매도 나에게 남이 아니며, 하느님에게도 내 아집이 만든 소원을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그냥 열심히 나를 돌아보고 돌아보게 됩니다. 내 아집, 평생을 두고 궁리하며 살아야 하는 이 아집을 어찌 내려 놓을지 고민하고 고민하게 됩니다. 실천하고 실천하게 됩니다.
대림주간, 부끄러운 마음으로 저는 저를 돌아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