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주간 12월 12일
“행복하십니다, 믿으시는 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루카 1장 45절
신앙의 삶은 나의 뜻과 하느님의 뜻이 하나 될 때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라 하십니다. 그리되기 위해 이 땅에 사는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하나 되어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는 왜 이 땅에 왔을까요? 어쩌면 하느님은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려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는 아프고 힘든 이와 함께 했습니다. 분명 눈앞에 있지만, 그렇게 고통스럽게 있지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 이들의 아픔, 그 아픔과 더불어 있었습니다. 저주받은 삶을 살아가는 이의 그 아픔과 더불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기적은 바로 그곳에서 힘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는 아픔과 더불어 있기 위해, 홀로 아파하지 않도록 이 땅에 와 더불어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그렇게 더불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게 하느님의 뜻과 하나 되어 사는 겁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만 더불어 있을 뿐, 사실 그 속 마음이 다르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과 하나 되어 사는 게 아닙니다. 정말 진심으로 아프고 힘든 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겁니다. 그들의 아픔을 외롭게 두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이 땅 신앙이 할 일입니다.
이런저런 고상하고 어려운 말로 하느님의 뜻을 설명하고 그것으로 논쟁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느님은 어려운 신학의 전당에 교수로 찾아온 것도 아니고, 자기 교리만 정답이라 거만하게 고개 들고 자신만이 하느님에게 더 가깝다고 여기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만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서는 노동으로 더불어 있고 죽어서는 고기가 되어 더불어 있는 가축의 자리, 자기 온 존재를 내어주면서도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는 그리고 조금도 고마움도 없이 차갑게 값으로만 계산되는 아픈 생명인 가축의 자리에 태어났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말구유는 어디일까요? 죽어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노동자의 외로운 아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4.16과 10.29의 외로운 아픔, 가난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의 외로운 아픔... 너무나 많은 말구유가 있다. 그 자리에 어쩌면 우린 작은 예수가 되어 찾아가 더불어 울고 웃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게 신앙이 아닐까. 그게 하느님의 뜻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우리 삶이 아닐까. 힘들어도 그 고난마저 하느님의 뜻이라며 살 때 결국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거라는 이성으로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불가능의 꿈을 믿으며 애쓰는 삶, 그 삶이 신앙이 아닐까. 불가능을 향한 그 고난의 길을 행복이라며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유지승 암브로시오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