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칠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씀
유대칠 옮김
1권
1.1 주여! 주 당신은 위대하시며, 찬양받으시기 합당하옵니다(시 145.3). 주 당신의 능력은 위대하시며, 당신의 지혜는 끝이 없습니다(시 147.5). 사람이란 건 사실 당신이 지으신 수많은 피조물 가운데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나 감히 당신을 찬양하길 원하옵니다. 사람은 당신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지어 그 결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숙명을 죄의 증거로 가지는 존재이옵니다. 또 주님 당신이 교만한 이와 대적함을 보이는 결과로 그러하기도 합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주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그저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주 당신을 찬양하길 바라옵니다. 그뿐 아니라, 주 당신은 우리를 깨우셔서 주 당신을 찬양하는 걸 기뻐하도록 만드십니다. 왜냐하면 주 당신은 우리를 만드실 때, 주 당신을 바라보며 살도록 만드신 까닭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은 주 당신 가운데 쉴 때까지 쉴 수가 없습니다. 주여! 주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주 당신을 찬양하는 것 그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먼저이고, 주 당신을 아는 것과 주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먼저인지, 부디 제가 알게 하시고 깨우치게 하소서! 주 당신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당신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주 당신을 알지 못하는 이가 설령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도 그건 당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 당신을 알기 위해 우선 당신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것인지요. 그런데 주 당신을 믿지 않는 이가 어찌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하신 말씀을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어찌 당신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 주 당신을 찾는 이들이 결국 당신을 찬양케 될 겁니다(시 22:26). 주 당신을 찾는 이들이 필시 당신을 만날 것이고(마태오 7.7), 당신을 만난 이들은 당신을 찬양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저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당신을 찾고자 합니다. 당신을 믿고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자 합니다. 저는 당신을 이미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여!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뜻을 전하는 이들을 통해 저에게 주신 믿음 가운데 당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유대칠 풀이
중세는 ‘종교’의 시대다. 그 이전에도 종교는 사람의 삶에 깊이 박혀 있었고 그 이후도 그렇지만, 우리가 중세라고 부르는 지중해 연안 그 시간 그 공간은 특히 그랬다. 유럽은 그리스도교의 시대였다. 동로마의 그리스도교(동방정교회)와 서로마의 그리스도교(가톨릭교회) 그리고 그 이외 그리스도교(오리엔트 정교회)가 있었지만 모두 그리스도교를 기본으로 한 신앙생활을 했다. 그 이외 지역엔 이슬람교와 유대교가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그들의 고민은 매우 종교적이었다. 혹은 종교의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중세만 그런 건 아니다. 근대도 그들에게 종교는 매우 중요했다. 수많은 근대철학자도 모두 신을 두고 고민했다. 하지만 중세와 근대의 가장 큰 차이는 어쩌면 ‘권위’다. 중세철학은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권위 있는 철학자의 문헌에 의존했다. 그 의존의 정도는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권위 있는 문헌이나 권위 있는 철학자의 철학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고 철학할 순 없었다. 교회에선 『성경』과 교부(敎父, Patres Ecclesiae)의 문헌이 권위를 가지는 문헌으로 신학교육의 기본이었다면, 철학에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과 일부 신플라톤주의 계열의 문헌이 그 역할을 했다. 지금처럼 ‘철학사(哲學史)’를 공부하거나 존재론(存在論) 혹은 인식론(認識論) 등등의 이름을 가진 철학의 분과를 교육하는 게 아니라, 권위 있는 철학 고전 강독이나 그와 관련된 교육으로 철학을 가르치고 또 공부했다. 서양의 중세는 종교의 시대이고 권위 있는 종교와 철학의 문헌이 철학의 중심에 있었다면, 근대는 종교의 시대이기는 하지만 더는 과거와 같이 권위의 문헌이 중심에 있지 않았다. 당장 개신교는 오랜 시간 권위의 자리에 있던 성전(聖傳, Traditio), 즉 성스러운 전통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히 교부의 중요성도 과거와 같지 않았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이나 그와 관련된 철학을 공부하는 게 형이상학이 아니다. 원래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인 『형이상학』이란 책을 중심으로 연구하던 게 ‘형이상학’이란 철학의 분과인데 이젠 아리스토텔레스 없이 독자적인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지 시작한 거다. 그렇게 근대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철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궁리한다. 그런데 그 궁리함은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스도교의 공간에선 그리스도교라는 조건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궁리했을 거다. 이슬람의 공간에선 이슬람교의 조건 속에서 그리고 유대교의 공간에선 유대교의 조건 속에서 궁리했을 거다. 그러니 우리가 ‘중세철학자’라 부르는 이들은 거의 그리스도교의 설교가나 신학자였고, 무슬림 신학자나 유대교 신학자다. 각각의 조건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궁리하는 혹은 궁리해야 하는 이들은 바로 그들이었으니 말이다.
종교는 신과의 합일, 즉 하나 됨이 가장 높은 차원의 행복이다. 신과 하나 됨! 그런데 여기에서 당장 문제가 등장한다. 신과 하나 되기 위해 ‘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신을 제대로 알 수 있을 만큼 사람의 능력이 대단하지 않다. 유한한 사람이 무한한 신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처음부터 사람은 신은 온전히 알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숙명(宿命)이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꿈꾼다. 더 행복한 삶을 위해 애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현주도 한결도 은결도 모두 마찬가지다. 이건 모든 사람의 가장 자연(natura)스러운 모습이다. 즉 ‘본성(natura)’이다. 본성상 우린 행복해지려 한다. 신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 신이 사람을 행복을 꿈꾸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행복 가운데 가장 높은 차원의 행복, 가장 행복한 행복은 신과의 하나 됨이다. 결국 신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우린 서로 길이 달라도 각자 신을 향한 여정을 살아간다. 신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신을 향하여 살기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하나 생긴다.
신을 알아서 신의 이름을 부르며 신을 찬양하고 신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가? 그런데 우린 신을 처음부터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니 그 이름을 부르지도 못한다. 당연한 찬양할 수도 없고 신을 만나 하나 되기 위해 나아가지도 못한다. 즉 이성만으로 신을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니 믿음, 즉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은 신을 향하게 한다. 신을 향하여 간절히 나아가는 그 마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이는 결국 신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고 간절히 바라는 이는 신을 만나게 된다. 그 신앙의 여정, 그 여정에 이성은 어느 게 더 나은 길인지 궁리한다. 신앙을 돕는단 말이다.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할 때, 그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그가 좋아하는 것도 제대로 모르고, 아는 게 거의 없을 때,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다가가 그를 만나 그와 연인이 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사랑’이다. 그를 향한 ‘바람’이다. 그 ‘사랑’과 ‘바람’이 간절하고 순수할 때, 그를 알게 하고 그와 더불어 행복을 꿈꾸는 연인이 되게 하는 거다. 만일 사랑만 있고 이성으로 고민하여 그에게 다가가지 않는다면, 오직 바람도 있고 진지한 고민이 없다면, 그 사랑이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과 이성에서 신앙을 이렇게 우선에 둔다. 하지만 신앙만 우선에 두고 이성을 무시해선 안 된다. 이성으로 고민하며 신에게 다가가야 하니 말이다. 그것이 신을 온전히 아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사람이 신을 향해 가는 최선이다.
설교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고민을 해결해야 “어찌 살 것인지” 제대로 고민하고 더 나은 답을 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중세철학의 고민도 이렇게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다.
유대칠 옮기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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