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칠의 디오니시우스 읽기
디오니시우스
신비신학
[온전히 하느님을 고백하고 만난다는 건 무엇인가?]
1장 신성한 어둠이란 무엇인가?
디오니시우스란 누군가 씀
유대칠 옮김
2. 한데 이건 아직 온전히 깨우치지 못한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이들, 즉 사람의 사고 대상에 집착해 그 이상의 초본질적인 실재가 있다고 믿고선, 어둠에 비밀리 숨어 있는 실재를 감히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는 이들에게 드러나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신성한 신비의 원리가 이들의 이해를 초월해 있다면, 피조물 가운데 가장 낮은 것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모든 것을 초월한 첫째 원인을 묘사하는 이들에 대해서 더 말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이런저런 다양한 것으로 만들어낸 상보다 더 뛰어나십니다. 반면, 우주의 모든 긍정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더 엄밀히 모든 것을 초월해 있기에 그것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긍정과 부정 사이, 모순이란 없습니다. 긍정과 부정은 모든 박탈의 개념보다 무한히 앞서 있고, 모든 긍정과 부정의 구별을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칠 풀이
하느님을 우리의 말로 어찌 표현할까요? 위대하시다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무한하시다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우리의 말로는 아예 하느님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말에 담길 분이라면, 우리의 생각에 담긴 분일 겁니다. 우리의 생각에 담긴 정도의 분이라면 정말 무한한 분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무한 그 이상의 무한, 그것을 초월한 무한으로 하느님께선 계실 것이기에 우린 하느님을 생각할 수도 말에 담을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란 말도 부족합니다. 우리가 아는 주인이란 말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느님께선 그저 우리에게 온전한 어둠으로 남아있는 분이십니다. 감히 우리의 이성으로 하느님을 이런 분 혹은 저런 분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을 향하여 첫걸음을 시작한 이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것은 ‘무지(無知)’의 고백입니다.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소리치며 우린 참 많이 그리고 참 오래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 모두 하느님을 정말 온전히 자기 생각과 말속에 담아내고 있을까요. 하느님은 이런저런 분이라 긍정하는 건 하느님을 그 긍정되는 말에 구속하는 꼴이 됩니다. “하느님은 나를 위한 분”이라 하지만, 하느님은 누군가를 위해 있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특히 연인 사이에 사용될 말로 하느님을 긍정하면 하느님은 그렇게 긍정으로 고백하는 이의 말에 구속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고난이 다가오면 하느님이 주시는 시련이라 생각합니다. 그럴듯하지만, 사실 이런 말 자체가 이미 하느님을 구속하고 있습니다. 모두와 더불어 있는 하느님, 모두와 더불어 모두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는 건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생각으로 이루어진 말속의 하느님뿐입니다. 그러나 참 하느님은 그런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항상 나란 존재의 생각과 욕심 그리고 추측과 상상의 밖, 우리의 욕심 모두를 초월해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향하여 고백하는 유일한 앎은 무엇으로도 구속되지 않는 하느님, 그러니 내 생각과 욕심으로도 구속할 수 없는 하느님, 알 수 없는 하느님뿐입니다.
유대칠 옮기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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