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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16. 2024

하느님은 내 욕심 안에 가둘 수 없는 분이십니다.

유대칠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씀

유대칠 옮김


1권 


2.2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내 주님을 저는 어떻게 불러 모셔야 하는지요? 제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는 주님께서 제 안에 찾아와 달라 청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의 하느님 당신이 제 안에 들어와 머물 자리가 과연 제 안 어디에 있을까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창세기 1장 1절), 그분이 제 안에 오셔서 머무실 수 있을까요? 주! 나의 하느님, 주님을 모실 자리가 제 안에 있습니까? 주님 당신께서 창조하신 천지조차 당신을 품을 수 없는데, 과연 제가 당신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아니 계셨다면, 이 모든 존재가 어찌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존재하는 이 모든 것이 당신을 담을 순 없겠지요. 저도 존재합니다. 당신이 제 안에 계시지 않으시다면, 저는 정말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왜 주님께 저에게 와 달라 청할까요? 제가 지옥에 끌려 내려가 있지 않지만, 이미 당신은 그곳에도 있으십니다(시편 138편 8절). 내가 지옥에 내려가 있더라도, 당신이 함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 제 안에 있지 않으시면, 저는 정말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있고, 당신을 통해 모든 것이 있고, 당신 안에 모든 것이 있기에 당신 안에 제가 없다면, 저는 아예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 저는 당신 가운데 있는데, 어찌 당신에게 저에게 와 달라 청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선 어디에서 오셔서 제 안에 계실 수 있겠습니까. 나의 하느님께서 “제가 하늘과 땅을 가득히 채우고 있습니다”(예레미야 23장 24절)라고 말씀하셨으니 제가 하늘과 땅 밖 어디로 물러나 나의 하느님께서 저에게 오시도록 해야 한단 말입니까. 


유대칠의 풀이     


교부도 스콜라 신학자도 신은 우리 생각을 벗어나 있는 초월적 존재라 확신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욕심, 그 모두를 초월한 존재가 바로 신이란 말이다. “나의 하느님 당신이 제 안에 들어와 머물 자리가 과연 제 안 어디에 있을까요?” 초월의 존재, 시공간을 초월해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욕심과 생각으로 담길 수 없는 초월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린 항상 더 나은 무언가를 욕심내고 우리의 이성은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고민한다. 그리고 그 수단은 대체로 참 이기적인 무엇이다. 나는 지금보다 더 좋게 있고 싶다. 그런데 그냥 좋고 싶은 게 아니라, 남보다 더 좋게 있고 싶다. 이미 그 마음에 다툼의 싹이 있다. 남보다 더 좋게 있고 싶은 마음은 사사로의 욕심이며 그 마음은 이미 타자를 이기고 타자를 적으로 두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가득한 곳이라면, 그곳은 다툼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신마저도 자기 이기심 안에 가둔다. 신과 대화하기보다 신에게 한없이 자기 욕망을 바라고 바란다. 신에게 재물을 바치는 것도 그 재물로 가난하고 힘든 이들이 더불어 잘 살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가 홀로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신에게 더 큰 소리로 자기 욕심을 소리 지르기 위함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신의 품에 있기 때문이라 믿는다.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 제 안에 있지 않으시면, 저는 정말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내 안에 신이 존재하고 내가 신 안에 존재하지 않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이 오직 나의 품 안에 내 욕심과 내 생각 가운데 구속되어 존재한다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을 초월한 신은 나의 안과 밖 어디든 존재하며 나는 그런 신의 품 가운데 머물기에 존재하는 거다. “저는 당신 가운데 있는데, 어찌 당신에게 저에게 와 달라 청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신 가운데 있지만 우린 신에게 자기에게 와 달라 청한다. 이미 신 가운데 있고 신이 내 안에 나와 더불어 있지만 우린 신에게 이리 와 나와 있으라 한다. 모든 걸 초월한 신을 내 욕심 안으로 들어와 머물라 소리친다. 그리고 자기 이기심을 신의 뜻이라 미화한다. 아니다. 어떤 이기심도 신과 더불어 있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한 하느님의 도성은 이기심의 나라가 아니라. 이타심의 나라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둘로 나온다. 하나는 더불어 사랑함이다. 즉 사회적 사랑이다. 다른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다. 나만이 홀로 사랑함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전자는 더불어 사랑함이고, 후자는 홀로 사랑함이다. 또 다르게 말하면 전자는 이타심의 사랑이고 후자는 이기심의 사랑이다. 이타심으로 더불어 사랑하는 이들은 홀로 좋음이 아니라, 더불어 좋음을 추구한다. 나 하나의 있음에 머물지 않고 더불어 있음을 향해 나의 욕심을 스스로 물리치고 물리친다. 그런 이들의 나라가 바로 하느님의 도성이다. 사사로운 사랑은 이렇지 않다. 홀로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한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다툼을 피할 수 없다. (De Genesi ad litteram 11.15.20) 사람의 나라, 이기심의 나라도 신을 섬긴다. 그러나 그 신은 자기 이기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참된 신은 내 욕심과 내 생각 가운데 구속되지 않고 나를 항상 물리치며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를 향하게 한다. 더불어 있게 한다. 신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미 내 안에 신이 더불어 있고 나의 밖도 신으로 가득하다. 이미 나는 충분히 신의 품 안에서 거룩하고 신성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 모두 그렇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내 주님을 저는 어떻게 불러 모셔야 하는지요? 제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는 주님께서 제 안에 찾아와 달라 청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의 하느님 당신이 제 안에 들어와 머물 자리가 과연 제 안 어디에 있을까요?” 나는 그리고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신은 이미 우리와 더불어 있다. 우리 욕심을 담아 신을 부를 필요 없다. 이미 우린 충분히 아름다운 존재다. 더 욕심내며 남보다 더 앞설 생각으로 그것을 도와 달라 신을 부르고 신에게 자기 이기심을 토해낼 필요 없다. 신은 당신의 욕심을 들어주는 존재가 아니기에 말이다. 


유대칠 옮기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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