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칠의 디오니시우스 읽기
디오니시우스
신비신학
[온전히 하느님을 고백하고 만난다는 건 무엇인가?]
1장 신성한 어둠이란 무엇인가?
디오니시우스란 누군가 씀
유대칠 옮김
3. 그래서 복된 바르톨로메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학이란 광대하지만 세밀하고, 복음 말씀은 광대하지만, 위대합니다. 그리고 다르게 말해서 간략합니다.” 제가 봤을 때, 그는 모든 이에게 선한 원인은 말이 많지만 동시에 길게 말하지 않고 말이 없다는 걸 초자연적으로 이해한 듯합니다. 말도 이해도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은 모든 것 위에 본질적으로 초월한 것으로 높임을 받고, 거룩하고 정결한 모든 걸 거처 모든 거룩한 꼭대기 위에 오르고, 모든 걸 뒤로하고 가려진 것 없이 진리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신성한 빛과 소리, 그리고 하늘의 말을 듣고 어둠으로 들어가세요.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말하듯이 모든 것을 벗어나 계십니다. 신성한 모세마저도 우선 정결케 된 이후,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서 떨어져 온전히 정결케 된 후에야 나팔 소리를 듣고, 조금의 흠도 없는 빛을 보라 엄히 명령받았습니다. 그렇게 정결하게 된 이후, 그는 그렇지 않은 군중에게서 떨어져 몇몇 선택된 사제와 함께 우선 거룩한 오름으로 정상을 향합니다. 그때 그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직접 만나지도 뵙지 못하고, 그분이 계신 곳을 보며 향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신성하고 가장 높은 것을 향하여 묵상하는 건 모든 것의 위에 계신 분께 복종함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온전히 알지 못하는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나고, 가장 거룩한 그 장소, 가장 높은 영적 꼭대기에 도달함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보는 이와 보이는 대상에게서 벗어나 감각으로 다가갈 수 없는 어둠으로 들어간 겁니다. 그 어둠은 참으로 신비한 곳입니다. 그 가운데 그는 지식에 관한 모든 지식을 닫아걸고 모든 것을 넘어선 분, 자신도 다른 이도 아닌 전적으로 그분께 속해 있으며 모든 지식이 멈추고 더 좋은 부분과 하나 되어 온전히 알 수 없고, 온전히 모르며, 우리 마음을 벗어나 있는 것을 아는 겁니다.
유대칠 풀이
모든 걸 다 알고 그래서 하느님도 온전히 다 알고, 그러니 하느님에게 이렇게 다가가면 하느님께선 원하는 소원을 다 이루어주실 것이란 생각을 한다면, 결코 하느님에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선 이 작은 욕심에 담길 수 없고, 그 작은 욕심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계산으로 헤아려지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가려진 것 없이 진리로 드러나기” 위해선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부끄럽지 않으려면 하느님을 이용하려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신성한 빛과 소리, 그리고 하늘의 말을 듣고 어둠으로 들어가세요.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말하듯이 모든 것을 벗어나 계십니다.” 결국 참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선 하느님을 마치 빛 가운데 온전히 드러나 내가 온전히 하느님을 다 안다는 생각을 버리고 어둠 속에서, 무지 속에서, 다가가야만 합니다. 저는 모릅니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신성한 모세마저도 우선 정결케 된 이후” 하느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었다. 즉, 욕심을 모두 내려놓은 뒤에야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온전히 알지 못하는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나고, 가장 거룩한 그 장소, 가장 높은 영적 꼭대기에 도달”하기 위해 하느님을 내 이성 속에 구속하지 마세요. 내 욕심 속에 구속하지도 마세요. 하느님께서 우리의 욕심과 이성에서 온전히 벗어나 만날 때 우리도 우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다가가 만날 수 있는 겁니다. “온전히 모르며, 우리 마음을 벗어나 있는” 하느님, 그 하느님께서 우리의 참 하느님이십니다.
유대칠 옮기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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