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있음'의 길이 거룩의 길이 아닐까요?

더불어 신학에서 공동 합의성에 대하여 1

by 유대칠 자까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저 또한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 또한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파견하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저는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으니,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7.21-22)


하느님과 우리는 이웃이란 말도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더불어 있습니다. 그분 안에 우리가 있고 우리의 만남 가운데 그분이 이미 더불어 있으십니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모습을 교회의 모범으로 보았습니다.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 합의성>에선 이 구절을 인용하며 교회의 기원이고 모범과 같은 모습이라 적고 있습니다.(45항) 저에게 이 구절은 여러 '더불어 신학'의 성서적 기초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다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 합의성>에서 이 구절을 발견하였을 때 참으로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를 보편 교회라고 합니다. 라띤말로 universale(우니베르살레)는 보편이란 말입니다. 하나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 되어 있을 때 다르게 됨은 분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리고 여러 하는 일이 서로 다른데 어떻게 하나 되어 있을 수 있을까요? 바로 지향점으로 인하여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은 노숙자에게 음식을 나누는 것을 경제적 이유를 위하여 선택한 직업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노숙자를 돕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냥 그 일을 함으로 받게 되는 수입으로 먹고살기에 그 일을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자신의 일은 엄밀하게 노숙자와 더불어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냥 스스로의 생계를 위한 것일지 모릅니다. 눈으로 보면 음식을 만들고 나누어도 말입니다. 그의 귀에 달콤한 이야기는 후원금이겠지요. 사실 그들의 수가 많아져도 노숙자의 외로움, 그 홀로 있음은 덜어지지 않습니다. 그와 마주한 이도 홀로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사람이니 말이니다. 서로 웃으며 외롭거나 울면서 외롭거나 외롭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다릅니다. 노숙자의 벗이 되어 그들의 눈물과 웃음이 되면서 어쩌면 제법 힘든 조건에서도 노숙자의 벗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겨움도 그의 행복을 일구는 한 부분이라 생각하며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며 벗이 됩니다. 눈으로 보면 그와 앞서 소개한 돈을 벌기 위한 직업으로 노숙자의 곁에 있는 이는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노숙자의 곁에서 그들의 음식을 준비하고 그들의 불편을 챙기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자는 엄밀하게 하나 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편의 질서 속에 있지 않습니다. 후자는 하나 되어 있습니다. 하나 되어 울고 웃고 있으니 말입니다. 보편 속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있기 위해선 나 아닌 너의 눈물과 미소가 우리 가운데 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될 수 없고 보편이 될 수 없습니다.


보편 교회란 이렇게 생각하면 더불어 울고 웃고 화내고 화해하는 그러한 교회입니다. 외롭게 살도록 두지지 않아야 하고, 하나 됨 가운데 이기심을 내세워서는 않아야 합니다. 이기심은 하나 됨을 파괴하는 주범이니 말입니다. 하나 되어 거룩해야 합니다. 누구는 더 거룩하고 누구는 덜 거룩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 되어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은 누군가가 더 많이 소유하고 누군가 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하느님이 더불어 있으시고 하느님 가운데 우리가 더불어 있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있을 때 모두가 경험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더불어 있다는 상태 말입니다.


공동 합의성, 조금 말이 어렵습니다. 더불어 나아감, 저는 그렇게 읽습니다. 교회뿐 아니라, 우리 사회도 더불어 나아가야 합니다. 명령을 기다리는 아랫사람과 명령하는 윗사람이 아닌 더불어 천천히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고 한 걸음씩 천천히 홀로 있음의 아집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의 더불어 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나아감의 여정이 거룩함의 여정이며 의로워지는 여정일 것입니다. 거룩과 의로움도 홀로 벽을 보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더불어 있는 이 시대의 외로운 홀로 흘리는 눈물과 더불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더불어 살고 더불어 생각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그 더불어 있음으로 홀로 있음을 더욱더 풍성하게 하는 것, 그것이 교회의 과제이고 지금 우리 사회의 과제가 아닐지.


더불어 신학을 모색하며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았습니다. 더불어 나아갈 때 우리 모두가 거룩해지는 것은 아닐까. 더불어 나아가는 걸음마다 우리의 의로움은 현실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0 11.1


[오캄연구소의 길이 홀로 감이 아닌 더불어감이 되도록 후원해주실 분들은 카카오 뱅크 3333-16-5216149 (유대칠)로 함께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교부 문헌 강좌'와 '더불어 신학' 그리고 철학 강좌를 준비합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summalogicae@kakao.com으로 문의해 주시면 됩니다. 서로에게 고마운 만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유대칠.]


<저의 칼럼 모음집입니다. 앞으로 저의 칼럼과 길지 않은 글들은 모두 일정 분량이 되면 모음집으로 묶을 생각입니다. 오캄연구소를 위하여 구입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www.bookk.co.kr/book/view/92628



photo6183810651001038964.jpg


매거진의 이전글신앙은 앎이 아니라,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