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있음'으로 역사는 흘러야 한다.

더불어 신학에서 공동 합의성에 대하여 2

by 유대칠 자까
"각자의 역할과 기여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만, 그 과정에서는 모든 이가 다 주인공들이다. "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 합의성> n.21)


'더불어' 있음의 신학은 '더불어' 있다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왜 '더불어 있음'의 신학이라 할까요? 홀로 있는 신학이 아니라, 나와 너가 함께 있다는 의미에서 더불어 신학입니다. 더불어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더불어 있음은 '그저 곁에 있음'이 아닙니다. '그저 곁에 있음'이 아니라, '한몫을 하며 곁에 있음'입니다. 정치인들이 국민의 말을 듣겠다면서 아프고 힘든 이들은 배제하고, 이미 이 사회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이미 짜인 회의를 한다면, 이 세상 부조리의 아픔과 힘겨움을 모르는 이들을 두고 모든 것이 짜인 회의를 한다면, 그것은 두고 우리는 더불어 있다 하지 않습니다. 그냥 가진 자의 곁에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더불어는 그 뜻에 한몫을 하며 곁에 있는 것입니다. 나의 곁에, 너 그리고 너의 곁에 내가 하나의 뜻에 더불어 있다는 말입니다.


제대로 더불어 있는 곳에선 윗사람이 윗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랫사람이 아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 합의성>에선 서로 다르지만 그 다름이 역할의 차이이고 기여의 차이라고 했습니다. 그 등급이나 격의 차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신부와 격이 구두 닦는 이의 격과 다르지 않습니다. 교수의 격이 학생의 격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역할이 다르고 그 더불어 있음의 기여가 다른 것입니다. 만일 격이 다르다면, 누군가 윗사람이 있고 그 옆에 그 윗사람의 시중을 드는 도구로의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둘은 주인과 노예와 같이 혹은 중심과 변두리 같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단지 기여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둘은 아예 그 근본이 다릅니다. 둘이 하나를 더불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이루고 다른 하나를 수단으로 사용될 뿐입니다. 이런 관계에서 곁에 있음은 하나의 뜻 가운데 한몫을 하며 더불어 있다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만일 평신도 사도직이라며 모임을 만들어 성직자들의 들러리를 시킨다면, 혹은 그냥 그것이 있어야 구색을 갖추기에 만든 것이라면, 평신도는 교회에 더불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역사, 지금 이 순간 교회의 역사에 능동으로 하나의 뜻을 이룸에 한몫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 합의성>에서 이야기하는 공동 합의성, 즉 더불어 나아감은 바로 그렇게 교회의 역사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만 생각해 볼 사항은 아닙니다. 목사가 결정하면 교회는 따른다는 식의 생각도 말이 되지 않고, 주지 스님이 결정하면 사찰은 따른다는 식의 생각도 정말 답답한 생각입니다. 주지인지 지주인지 모를 일입니다. 여기에서 교회와 사찰은 도대체 무엇인지요? 거기에 더불어 있음이 있는지요. 그냥 회의 자리 한쪽 끝에 평신도 한 자리 만들어 곁에 둔다고 더불어 있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직자도 자기 내어줌으로 평신도를 품어야 하며 평신도 역시 자기 내어줌으로 성직자를 안아주어야 합니다. 그때 이 둘은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그렇게 교회의 역사는 흘러야 합니다. 위대한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수많은 실수 속에 살아가는 우리 일상의 작은 영웅들이 교회 역사의 주역으로 능동적으로 다가와 한몫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실수하여 방황하며 조금 늦어져도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마태 5,3)


지금 더불어 있는 누군가가 힘없어 이 사회에 큰 소리를 낼 수 없고 그저 대단해 보이지 않는 그 무엇으로 보이나요. 그래서 그와 더불어 있어야 합니다. 그는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이 땅의 눈으로 대단해 보이지 않는 그가 하늘나라의 복된 시민입니다. 가진 자들의 홀로 있음, 그 홀로 있음에 익숙한 우리는 아직 부자와 권력자의 신학을 따르며 사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를 그들의 주변에 둘 뿐입니다. 모두가 같은 모습으로, 윗사람도 아랫사람도 없이 나눔으로 가난하며 행복한 이들, 그 더불어 있음에 하느님도 더불어 있으시리라 믿어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0 1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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