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삶, 유대칠의 철학사 강의
감각을 넘어 하나를 향하는 존재
여러분, 우리가 “나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때, 단순히 내 몸과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에서는 ‘나’를 단순한 개별적 자아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신플라톤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us)는 ‘나’를 물질적인 세계에 갇힌 존재로 보면서도, 본래적으로 신적 질서 속에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감각 세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사실을 망각하게 되죠. 그러므로 신플라톤주의에서 ‘나’의 의미는 단순한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Hen)’로 돌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플로티노스의 철학에서 실재의 구조는 ‘하나’ – ‘정신(Nous)’ – ‘영혼(Psyche)’ – ‘물질 세계’라는 위계적 체계를 가집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완전한 실재입니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이데아의 세계가 감각적 세계보다 더 참된 것이라면, 신플라톤주의에서는 ‘하나’가 모든 걸 초월하는 절대적 존재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면 ‘하나’란 무엇일까요?
‘하나’는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며, 모든 것이 향하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존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거나 들을 수 있는 사물들은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상은 책상이고, 사람은 사람이며, 나무는 나무입니다. 각각 다르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그런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단일성, 즉 모든 다름이 사라진 상태이며, 모든 게 그 안에서 통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빛을 바라볼 때를 생각해봅시다. 햇빛을 보면 우리는 따뜻함을 느끼고, 사물을 밝게 비추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빛 자체를 직접 본 적이 있을까요? 우리는 빛에 의해 비추어진 것들을 보고, 빛이 만들어낸 현상을 경험할 뿐, 빛 자체를 온전히 경험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지만, 그것 자체를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는 어떠한 결핍도 없는 완전한 실재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원하고, 외로우면 친구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는 스스로 완전하기에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이며, 변화하지 않는 절대적 실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에서 비롯되었을까요?
플로티노스는 ‘유출설’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넘쳐흐르는 원천과 같습니다. 마치 태양이 빛을 발하듯이, ‘하나’는 넘치는 충만함 속에서 ‘정신’을 낳고, ‘정신’은 다시 ‘영혼’을 낳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점점 더 불완전한 것이 생겨납니다. ‘하나’에서 가장 가까운 정신은 가장 신적이고 완전하지만, 영혼은 정신에서 한 단계 아래로 내려오며 물질 세계와 결합하면서 불완전성을 띠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감각적 세계는 가장 불완전한 영역이며, 참된 실재에서 가장 멀어진 곳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신플라톤주의에서 ‘나’는 단순한 감각적 자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나’는 영혼이 물질 세계 속에서 감각적인 경험과 결합하면서 형성된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개별적 자아는 참된 자아가 아닙니다. 참된 자아는 정신과 연결된 상태이며, 감각 세계에서 벗어나야만 온전히 자신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유는 플라톤의 철학과 매우 유사하지만, 플라톤과는 중요한 차이도 존재합니다. 플라톤은 감각을 통해 얻는 인식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고, 진리는 감각이 아니라 이데아를 통해 깨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플로티노스도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감각적 인식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플라톤이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이데아를 상기해야 한다’라고 보았다면, 플로티노스는 단순한 사유를 넘어 ‘하나’와의 합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보았습니다. 이 점에서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의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신비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됩니다.
플로티노스에게서 중요한 개념은 ‘하나로의 회귀’입니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감각적 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는 참된 자아를 알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감각적인 자아는 육체와 연결된 상태에서 감각적 경험과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와 단절된 상태이며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감각적 현실을 떠나, 정신을 통해 ‘하나’를 직관하고 합일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참된 자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단순히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깊은 명상과 내적 성찰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플로티노스는 이를 ‘신비적 합일’이라고 표현하며, 이는 개별적인 자아를 초월하여 ‘하나’와 하나가 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때 ‘나’는 더 이상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과 하나가 되는 존재로 변화합니다. 즉, 신플라톤주의에서 ‘나’는 개별성을 뛰어넘어 신적 질서 속으로 회귀해야 하는 존재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감각적 경험과 현실을 긍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을 인식의 출발점으로 보았고,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각을 거쳐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플로티노스는 감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감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은 한계가 있으며, 궁극적인 진리는 감각을 떠나야만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신플라톤주의적 관점은 이후 신비주의 철학과 밀접하게 연결되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교 신학과 만나면서, 감각적 현실을 넘어 신과 합일하는 과정이 강조되었고, 이는 그리스도교 초기 교부 신학과 중세 스콜라 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감각적 기쁨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기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신비주의적 사유가 바로 이 철학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신플라톤주의에서 ‘나’란 단순한 개별적 자아가 아니라, 감각적 세계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신적 존재로 돌아가야 하는 영혼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감각적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들이 온전한 것이 아니며, 철학적 사유와 관조를 통해 본래적 자아로 회귀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와 합일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유대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