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아니 에르노 코너에서 책 등을 훑다가 제목만 보고 집어왔다. 전에 읽었던 ‘단순한 열정’처럼 바닥까지 솔직함과 은은한 섹슈얼리티를 기대하고서. 성별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제목을 보자마자 내용이 기대돼 설렜었다. 책 뒷 면에 크게 쓰인 번역가의 문장도 보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 소설보다 더 큰 삶이 있다. 나의 아버지와 내가 떠나온 세계가 있다. 당신은 어떠한가? 소설보다 더 큰 무엇이 보이는가?”
그가 쓴 ‘남자’가 ‘아버지’라는 것을 책을 펼친 후에야 알았고, 아차 싶었다가, 세상에, 라며 울먹이는 감탄으로 변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화려한 수사와 감정 없이 쓸 수 있을까. 원가족, 심지어 이제 막 죽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 또한 쉽지 않았다고, 소설을 쓰다가 멈추었다고 글에서 이야기한다. 그를 표현하려면 희로애락의 이야기가 아니라 담담하게 설명하고 나열하는 방식이어야 했다고 말한다.
시처럼 쓴 추억도 환희에 찬 조롱도 없을 것이다. 단조로운 글이 자연스럽게 내게 온다. 내가 부모님께 중요한 소식을 말하기 위해 썼던 글과 같은 글이. p17
단조로운 글은 읽는 사람을 훨씬 더 참여하게 한다. 주인공이나 작가의 감정선에 몰입하지 않게 된다. 작가가 주인공과 거리를 두고 있었고, 나는 나열된 글을 보며 트레이싱지 같은 레이어로 한 커플 더 벽을 두며 읽는 기분이었다. 얇고 반투명한 벽을 두고 나는 내 아버지를 그렸다. 이래서 아니 에르노의 글을 읽으면, 나도 서둘러 글을 쓰고 싶어 몸이 간지럽다. 문장과 문단 사이에서 마침표가 찍힐 때마다 밀려오는 기억과 생각을 쏟아내고 싶어 진다.
나는 천천히 쓰고 있다. 사실과 선택의 집합에서 한 인생을 잘 나타내는 실타래를 밝혀내기 위해 애쓰면서, 조금씩 아버지만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가는 듯한 기분이다. p36
그의 ‘나만의 아버지’가 사라지고 남는 건, 어쩌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계급일 수도, 전쟁에서 살아남은 시절과 생존이 해결된 시절의 시차일 수도, 자연을 먹잇감으로 보는 세대와 풍경을 바라보며 여유로움을 찾는 세대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가 그만의 특별한 아버지를 지웠기 때문에 나도 나의 아버지를 한 자리에 떳떳이 세워볼 수 있었다. 이제야 제목의 맥락이 읽힌다. 그를 이해한다는 건, 그의 본래 자리를 돌려주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가 있던 곳. 그는 늘 거기에 있었으나 건너와 버린 내가 나의 자리에서 자꾸 그를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내게 아버지는 늘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 이해가 안 되는 부류, 부끄러우면서 신기한 사람이었다.
이 책은 아니 에르노가 세운 아버지의 묘비다. 이 묘비는 본래 그가 있던 자리, 그걸 되살린 곳이다. 그가 치른 100쪽 남짓의 장례식인 셈이다. 마침내 아버지를 제자리에 돌다 놓고, 묘비에 흙을 덮은 후, 그 흙을 밟고 일어서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야만 손에 뭍은 흙을 탁탁 털어낼 수 있으니까. 그 손으로 내 아이의 손을 잡아야 한다.
내가 교양 있는 부르주아의 세상으로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두고 가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일을 마쳤다. p91
글을 쓰며 하류라 여겨지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그에 따른 소외를 고발하는 일 사이에서 좁다란 길을 본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 행복하기도 했으며, 우리가 살던 환경의 수치스러운 방적들이기도 했으니까. p43
사람들이 내게 내 취향, 재즈 아니면 클래식, 타티 아니면 르네클레즈를 물었을 때 그것만으로도 내가 다른 세계로 건너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p53
아버지는 단순하고 하찮은 혹은 용감한 사람들의 부류에 들어갔다. p65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더 이상 할 말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글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p68
어느 날, 그가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절대 너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다.” p77
내가 교양 있는 부르주아의 세상으로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두고 가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일을 마쳤다. p91
어쩌면 그의 가장 커다란 자부심 아니 심지어 그의 존재 이유는 자신을 멸시하는 세상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p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