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근 날, 벌건 대낮과 어울리는 질문 "왜 사세요?"
책의 첫 문장을 읽고 바로 사버린 오래된 에세이가 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뭔 소린지 도통 모르겠지만.. 그런 거 고민하고 살기엔 지금 너무 벅차니까. 터덜터덜 지쳐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고서 '아, 인생.'이라는 짧은 고찰이 고작일 뿐.
그래서 한 번씩 이런 뜬구름 같은 질문을 만나면 깜짝 놀란다. <그 후>에서 송아름(김민희) 질문이 그랬다.
출판사 첫 출근한 날이다. 벌건 대낮, 점심을 먹다가 사장(권해효)에게 묻는다.
"왜 사세요?"
너무나 진지하게.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다. 세상에 그런 의미가 어디 있겠냐는 헛웃음을 연발하는 사장.
아름이 대답한다. 어차피 진짜가 뭔지 모른다면 그냥 믿고 살면 되지 않냐는 거다.
그런 그녀가 믿는 세 가지.
'전 제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믿어요.'
'언제든 죽어도 괜찮다는 걸 믿어요.'
'마지막으로 세상이 모두 그대로 아름답다는 걸 믿어요.'
알베르 카뮈는 이 말을 듣고 어떤 대답을 했을까.
의미라느니, 진리라느니 그런 붕 뜬 소리 잡느라 시간 보내지 말고 그냥 믿으면 되잖아요, 라는 단순함에 사장도, 나도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너 똑똑하구나', '정말 똑똑해'.
마지막 대답이 가장 홍상수가 영화로 담아내는 아름다움이라 느꼈다. 그의 영화엔 미장센이 없다. 그런 기법과 화려함은 신경 쓰지 않는다.
흑백으로 담은 장면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사건이 있고 사람이 있다. 그 순간의 그 인물의 표정, 제스처, 찰나의 감정. 그걸 담기 위해 카메라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름이 믿는 세 가지가 감독이 믿고 사는 이유일까. 그의 영화를 지금껏 보다 보니, 스크린 너머로 나지막이 하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모든 장면이, 모든 감정이 아름답다. 있는 그대로 담아내자.
각자가 보는 세계는 모두 다르고 주인공도 모두 다르다. 믿을 수 있는 건 단 하나, 지금 여기 내가 있고 네가 있다는 것.
영화는 시종일관 유머로 가득 차 있다. 핏-하고 웃다가 푸하하 박장대소까지. 유머는 기본적으로 '공감'을 전제로 한다. 내가 웃었던 모든 포인트에 나의 충동, 나의 찌질함, 나의 비겁함이 있었다.
난 편안히 의자에 기댄 채 그들이 사는 모습에 웃음을 보냈지만, 정작 장면 속 인물은 애가 타고 화가 나고 진지한 사랑 중일 테지.
주인공 사장님(권해효)는 고개를 숙인 모습이 자주 나온다. 삐죽- 입을 내밀고. 포스터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
나의 찌질함에 차마 화를 내지도 못하고... 이 솔직한 모습이 그를 가장 인간적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불륜을 정당화하려 하는 그에게 나도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그저 술잔을 따라 주고 싶도록 만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