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규에는 '반려동물'이 없다.
육아휴직은 있는데 왜 반려견 휴직은 없는 거야?
나도 반려견 휴직 좀 써야지 안 되겠어.
후배들과 최근 회사 휴직자 명단을 읊다 툭 던진 말에 돌아온 건 "그러게요ㅎㅎㅎ" 하는 가벼운 웃음소리였다. 16년 동안 현장을 누비며 남들 쉴 때 자리를 지켰던 선배의 뼈 있는 농담에 그들은 적당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내 배 아파 낳은 아이는 아니지만, 우리 집 '라떼'는 보살핌이 절실한 아이다. 개농장에서 구조되어 내게 오기까지, 녀석이 마주했을 끔찍한 기억은 여전히 라떼의 몸짓 곳곳에 상처로 남아 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남자는 유독 경계한다. 사람이 너무 많아도 패닉이 온다.
조심히 아끼며 사랑을 주려 노력하지만, 직업 특성상 절대적인 업무시간도 길고 약속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남겨진 아이를 생각하면 그냥 휴직을 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차올랐다.
반려동물 인구 1,500만 시대. 세 집 건너 한 집이 가족이라 말하지만, 정작 그 가족이 아플 때 곁을 지킬 권리는 어디 있을까. 기사 속에 등장하는 '반려동물은 가족'이라는 문구는 이제 너무나 당연해졌지만, 사무실 책상 위에서 마주한 현실은 차갑고 냉정했다.
"아니 이 녀석이 자기 개가 죽었다고 연차를 쓴다는거야"
최근에도 모 선배가 엄청 황당했다면서 자신의 개가 죽었다고 연차를 쓴 한 후배 에피소드를 얘기했다. 목소리가 다 죽어서는 얘기를 하는데 알았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세상이 변했다는 얘기였지만 행간에는 반려동물 죽음이 연차의 사유가 될 수 있느냐는 기본 전제가 깔려있었다.
나는 조용히 사내 전산망을 켜고 사규집을 뒤져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반려동물'이나 '강아지'라는 단어는 없었다. 아프거나, 아기를 낳거나, 유학을 가는 등 전형적인 사유들뿐이었다.
그나마 '가족돌봄휴직'이라는 제도가 눈에 띄었다. 혹시 여기에 라떼가 들어갈 자리가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규정은 단호했다. 가족의 범위는 부모, 배우자, 배우자의 부모, 자녀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마저도 증빙을 위해 '가족관계증명서'를 요구했다.
자식 같은 강아지는 안 되냐고 묻고 싶었다. 라떼에게는 국가가 발행한 동물등록증이 있고, 우리와 함께 먹고 자고 살고 있는데. 왜 휴직 사유서에 적을 칸은 없는 걸까. 연 끊고 사는, 가족 같지도 않은 법적 가족도 많은데 대체 가족의 범위는 누가 정하는 거냐고.
혹시 내가, 그럴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그래야할 일이 생겨 인사팀 문을 두드려 "강아지가 아파서 휴직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어떤일이 벌어질까? 16년 차 직장인으로 회사에서 쌓아온 열심히 일하는 이미지는 한 순간에 날아가겠지. 남편은 바로 "그럼 잘리겠지"라고 한다. 어느날 내가 이 아이를 위해 휴가나 휴직을 써야 할 일이 생긴다면 '개인사유'라고 모호한 이유를 들어야 할 거라는 결론이 났다. 나 스스로 돌봄이 필요하다든가. (사실은 강아지 돌봄을 못하면 내 마음이 아파서 돌봄이 필요해질거니까. 틀린말은 아니지 않나)
그래도 혹시나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싶어 기사를 찾아봤다. 반려동물 경조휴가는 그래도 조금 생기는 추세다. 러쉬코리아와 롯데백화점 등 반려동물 경조사 휴가를 주는 회사들이 많이 생겼다. 입양이나 장례 시 하루 휴가를 주거나, 양육수당을 주는 곳도 생겼다.
하지만 '반려동물 휴직'이라고 치자 반려동물도 가족인데 육아휴직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기사들만 나온다. 유일하게 허벌라이프가 가족돌봄휴가에 반려동물도 포함하는 복지제도를 운영한다는 걸 공개해놨다.
해외로 눈을 돌리면 더 낯선 단어가 등장한다. 'Fur-ternity leave(퍼터니티 리브)'. 육아휴가 단어를 변형한 털 뭉치(Fur) 가족을 위한 육아휴직이라니. 하지만 그런 용어가 생길 정도라니 한국보다 상황이 나아 보인다.
이탈리아에선 한 여성이 암 수술을 받은 자신의 반려견을 위해 이틀의 유급 휴가를 냈다가 거절 당하자 소송을 해 승소했다. 여성이 일하는 대학은 개인 연차로 처리했는데, 여성 측은 동물을 고통 속에 방치는 건 동물 유기, 학대라는 법을 근거로 들었는데 인정됐다. 판사는 여성이 혼자 살고 있어 개를 돌볼 대안도 없다고 인정했다. 이 판결 이후에 수의사 진단서가 있으면 반려동물 돌봄을 위한 유급 휴가를 청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3년 전인 2022년 더불어민주당 이용선 의원이 반려동물이 아플 때 5일의 연차를 보장하는 법안을 냈던 적이 있었다. 남녀고용평등법상 우리나라는 조부모와 부모, 배우자, 배우자와 부모, 자녀, 손자녀의 질병 사고 등으로 돌봄 휴직을 신청하면 최장 10일의 휴직을 허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반려동물은 그 대상이 아니다. 때문에 가족의 지위를 가지는 반려동물도 돌봄 휴가에 준하는 휴가를 5일간 인정하자는 게 내용이다. 하지만 당시 이 법안은 역차별이라는 논란만 남긴채 철회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5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길을 열어주는 것 만으로도 의미가 있었을텐데. 5일이라는 기준을 세운게 오히려 벽을 만든 건 아닌지 아쉬운 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탈리아의 사례처럼 누군가 용기 있는 자가 나서서 휴직 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생기길 바란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도 이탈리아 여성이 법적 다툼때 근거로 든 반려동물 학대 금지를 규정한 법이 있다. 그게 나일 순 없냐고? 아직 인사팀 문을 두드리는 대신 구글 창을 뒤적이는 소심함이 나의 한계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오늘도 나를 종일 기다렸을, 꼬리를 흔들며 나오는 해맑은 라떼를 본다. 법이 정한 테두리 밖에서, 오직 나만 기다리고 있는 나의 가족. 이 아이를 위해 나는 조금 더 비겁하지 않을 방법을 고민해보기로 했다. 사회가 답을 주지 않는다면, 나만의 질문을 쌓아가며 그 길을 내 보는 수밖에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