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과 잡종, 그 서글픈 아이러니
귀엽다. 웰시코기예요?
잘생겼네요. 잭러셀이죠?
우리 개는 흰색 털에 갈색 하트 모양 얼룩이 있다. 수제비처럼 접힌 귀가 매력이다. 몸통은 길고 다리는 짧아서 이렇게 보면 웰시코기 같고 저렇게 보면 영화 마스크에 나온 개로 유명한 잭러셀 테리어 같아 보인다. 그렇다. 시고르자브종, 똥개, 믹스견이라 불리는 잡종개다.
애초 데려올때부터 믹스견이라는걸 한눈에 알 수 있었지만, 사람들이 자꾸 품종을 묻는 바람에 나도 뭔가 대답을 하고 싶어졌다. "믹스예요. 코기 닮기는 했는데" 대신에 당당하게. 솔직히 진짜 라떼의 족보가 궁금하기도 했다. '혹시나 품종견일지도'라는 아주 작은 기대도 없지 않았다.
결국 인터넷을 뒤지다 남편에겐 비밀로 하고 무려 15만원이나 하는 유전자 검사 키트를 주문해버렸다. 구강면봉으로 DNA를 분석해 품종과 유전질환을 확인한다고 써 있었다. 며칠 뒤 택배로 유전자검사 키트가 도착했다. 길쭉한 면봉으로 개의 입 안의 침을 훑어서 보내는건데 사람 유전자 검사 방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전자 검사 신청을 한걸 잊어버릴 때쯤이었을거다. 한달뒤 결과가 도착했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결과 파일을 열었다. 16페이지짜리 문서엔 라떼의 유전자 혈통검사 결과 비중이 높은 순으로 견종이 나열돼 있었다.
진도 49%
비글 10%
풍산 8%
치와와 7%
샤페이 6%
시바이누 5%
기타 15% (동경, 토사이누 등)
의외의 결과에 웃음이 터졌다. 한마디로 개잡종이란 얘기였다.
내가 생각했던 코기나 잭러셀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과를 받아들고 보니 또 이해가 됐다.
진도의 얼굴형과 명민함! '맞군. 어쩐지 똑똑하고 나에게 충성스러웠어'
비글의 짧은 다리와 장난끼. '뜀박질하는 게 어쩐지 심상치 않더라니'
그외에 풍산개 아래로 가선 나도 대체 어떤 점이 닮은건지 고개가 갸웃거려졌지만, 저 견종들의 이미지와 특징들을 찾아보며 다시 라떼에 대해 공부했다. 참 조상이 많은 소중한 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오랜 세월 다양한 견종들의 역사와 세월을 지나 우리 라떼라는 귀한 존재가 나오게 된거란 것을.
유전자 검사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내 빈 통장과, 당당히 대답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15만원짜리 유전자검사를 받았단 사실은 말 못하고.
요즘에도 산책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묻는다. 난 당당하게 얘기한다.
잭러셀인가봐요?
진도와 비글이 섞였어요
진도 얼굴에 똑똑한 두뇌를 갖췄다고. 다리가 짧고 뛰어다니길 좋아하는건 비글 유전자 때문일거라고.
왜 이렇게 품종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나 생각해보니 나 때문이다. 인터넷 쇼핑몰을 뒤지고 뒤져 예쁜 옷을 입히고, 카페에 가면 맨 바닥 대신 라떼용 방석을 깔고 앉게 한다. 귀하게, 사랑 듬뿍 주며 키우다보니 라떼에게서 도도함이 풍기나 보다.
품종이 뭐든 그게 뭐가 중요하리. 건강하게만 커다오. 이게 솔직한 내 마음이다.
근데 남편은 여전히 뭔가 품종견스러운게 욕심나나보다. 옆에서 라떼를 붙잡고는 교육을 하고 있다.
"라떼, 넌 잭러셀이야. 알겠지? 누가 물어보면 잭러셀이요 해"
입을 벌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라떼는 정작 간식에만 관심이 있는듯하다.
"잭러셀이 먹는건가요?"라는 표정으로.
몇년전 펫샵에서 흰색 순종 포메라니안라고 해서 400만원을 내고 데려왔는데, 자꾸 갈색 털이 나고 몸집이 커진다고 제보를 해 취재를 한 적이 있었다. 펫샵에 따졌더니 미안하다며 돈은 못 돌려주고 개를 바꿔준다고 했다는 황당한 제보였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순종'이라는 틀이 얼마나 취약한지. 사실 순종도 결국 인간이 원하는 외형을 갖추기위해 교배 등으로 만든 잡종이라는 점, 그리고 이들의 근친교배로 혈통을 이어가기 때문에 건강에 취약하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세계애견연맹에 등록된 순종 중 대부분은 인간이 원하는 특징을 얻기 위해 수백 년에 걸쳐 의도적으로 특정 품종의 개를 엄선해 교배시켜 탄생한 것들이다. 근친 교배를 통해 혈통을 고정하는 과정 중 열성 유전인자가 농축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중략)
똥개는 튼튼하다. 뉴욕타임스는 똥개를 ‘최고 품종의 개’로 꼽았다. 똥개는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개발한 개의 좋은 점을 모두 갖췄다. 오랜 세월에 걸쳐 결합된 다양한 유전자 덕분에 유전적 결함이 거의 없다. 덴마크의 한 연구에 따르면 똥개의 수명은 순종보다 길기까지 하다.
-동아일보([O2/커버스토리]나는 똥개다 2012.7.22)
잘 키운 '시고르자브종' 하나가 열 순종 안 부럽다. 아니, 사랑 받는 라떼에게 더 이상 족보 따위는 필요 없다. 이미 내 마음속에선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라떼'라는 독보적인 품종이 완성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