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들으면 개-억울할 일
우연히 쇼츠를 보다가 빵 터진 적이 있다. AI 강아지 '쎄리'가 "가출했다"며 찜질방에 앉아있는 에피소드였다. 기자가 왜 이러고 있냐고 묻자, 쎄리는 주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큰 상처를 받았다며 서럽게 털어놓는다.
"주인이 문 열고 들어오자마자 '개피곤해'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피곤하게 만들었나 싶어서 조용히 앉아있었는데,
이번에는 누구랑 통화하다가 '개웃겨' 이러는 거예요.
내가 언제 웃겼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개짜증 나!' 이러는 거예요.
엄마, 내가 그렇게 짜증 나아? 엉엉엉…."
<유튜브 '쎄리는 로딩중' 중에서>
한참을 웃다가 문득 거실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우리 집 강아지 '라떼'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의 그 순수한 눈망울에 방금 내가 내뱉은 '개피곤', '개짜증' 같은 단어들이 비쳐 보였다. 정말 강아지의 입장에서 들어본다면 '개(가) 피곤하다', '개(가) 짜증 난다'로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 아닌가.
욕을 할 때도 우리는 **개-**를 붙이는데, '개팔자가 상팔자'라고 하는 요즘 시대에 뭔가 안 어울리는 말이다.
접두사 '개-'는 실제로 '정도가 심한'이라는 뜻도 있지만, '가짜의', '함부로 된'이라는 부정적 의미도 있다. 라떼를 보며 내뱉었던 무심한 말들을 반성했다. 혼잣말로라도 라떼에게 들리진 않게 조심해야지.
"라떼야, 엄마 오늘 진짜 개 바빴어! 엄마 너무 개 힘들어! "라고 했을 때, 라떼가 느꼈을 (쇼츠 속 강아지 같은) 억울한 표정을 상상해 보니 명예훼손 감이다.
우리는 화가 나거나 비속어를 쓸 때 습관적으로 '개-'를 붙이곤 한다. 그런데 반려견이 가족의 중심이 된 요즘 시대에, 가장 사랑받는 존재의 이름이 가장 거친 표현의 머리글자가 된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실제로 접두사 '개-'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다.
1.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2. ‘헛된’, ‘쓸데없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3. ‘정도가 심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국립국어원에도 비슷한 질문이 올라와 있었다. "개웃기다 등은 비속어인가요?"라는 질문에 "표준어로 보기 어렵고 해당 표현에 대한 인식 역시 좋지 않으므로, 되도록 쓰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라는 단호한 답변이 달려 있다.
사전 속 '개-'는 온통 부정적인 뜻뿐이었다. 하지만 오픈사전에 누군가 남긴 정의에는 깊은 공감이 갔다.
개-: 과거에는 부정적 단어 앞에 쓰였으나, 오늘날은 청소년들이 '많이', '매우'라는 강조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
요즘은 긍정적인 표현에도 '개-'가 쓰인다. 개멋짐, 개맛있어, 개신남! 이제는 '개-' 대신 다른 강조 표현을 써보려 노력하지만, 가끔 너무 좋을 때 튀어나오는 "개좋아!"는 어쩔 수 없다. 그것이 내 벅찬 감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국어사전에도 '매우', '많이'를 강조하는 긍정적인 접두사라는 뜻이 추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부정적인 상황에서는 개들에게 미안하지 않게 사용을 자제하되, 최고의 찬사를 보낼 때는 기꺼이 '개-'를 빌려 쓰는 식으로 말이다.
라떼야, 이제는 오해하지 마. 엄마는 너를 정말 '개' 사랑해! 우리 '개' 행복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