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팅 뒤 단상
젊은 남자분이 사타구니쪽의 탈장 수술을 받으러 왔다.
여자들 (나 + 간호사들) 이 가득한 수술실에서 하반신 마취가 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채로 바지를 내리고 제모를 받고 있는 기분은, 절대 좋을리가 없을터.
제모 후에 테이프로 마지막 마무리를 하던 간호사가 바닥에 테이프를 떨어뜨렸다.
실수로 테이프를 밟고 뒤뚱거리다가 다른 간호사와 눈이 마추치자 둘이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문득 환자분이 '죄송합니다' 한다.
의사나 간호사들은 일상적으로 보는 것들이니
얼굴이나 사타구니나 다를 것이 없는데, 막상 벗고 있는 사람에겐 그런 느낌도 아닐뿐더러, 무엇을 보고 웃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니. 오해하실까 싶어 상황을 설명했다.
'저희 간호사가 바닥에 테이프를 밟아서요...'
..- 제가 석사할때 쥐실험을 해서 쥐를 많이 잡았거든요.
제가 실험대위에 쥐가 된 것 같네요.
다른 분들은 사람이어서 저를 구경하고 있고.."
말투는 온화하지만 (당연히) 기분이 매우 나쁘실 것만 같았다.
"쥐한테 좀 잘해줄껄 그러셨어요?"
말을 돌리며 얼른 수면제(+기억을 지우는 약)를 드렸다
잠이 안오는 듯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기에 말을 걸었다.
"근데 쥐로 무슨 실험 하셨어요?"
"아.. 숙취해소제 연구요.. 여명이랑.. 컨디션.."
술 좋아하는 간호사들의 귀가 쫑긋하다.
실험 설계부터 이야기를 쭉 해주시는데 흥미진진했다.
쥐에게 숙취 해소제와 술을 먹인다음에 수영을 시킨다고!
"xxx브랜드의 xxx가 진짜 짱이에요. 다른 브랜드랑은 효과를 비교할 수도 없어요" 라고 말씀하시는데
간호사가 얼굴을 쓱 내밀고 묻는다.
"술 마시기 전에 마시는게 효과가 좋아요? 아니면 술 마신 후에 마시는게 더 도움이 되요?"
한참 이야기를 하시고 회사 이야기로 넘어가서 잡담을 하시던 분이 이제 마음이 많이 풀리셨는지.
'감사합니다.' 인사하시며
"제가 퇴원하면 인삼 가져다 드릴께요. 저희 부모님이 인삼농사를 크게 하시거든요" 한다.
수술하시는 선생님께선 계속 거절하시다가,
내가 "어차피 기억도 못하실텐데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하자 맘편하게 "네~ 그러세요" 하시고 환자분은 "안잊을꺼에요! 기억할껍니다!" 하고 스르르 잠이 드셨다.
수술이 끝나고 눈을뜬 환자가 나를 보며 배시시~ 웃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씀하신다.
"(의기양양한 미소와 함께) 제가 인삼 까먹을줄 아셨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생님은 꼭 가져다드릴께요 ^___^ "
헉... 왜 기억을 잃지않은거지! 약을 분명 드렸는데!
하고 내가 당황하자, 간호사가 한마디 한다.
"내일 되면 기억 못해요 ㅋ 아직 약기운이 남아서 그렇지"
궁금하다. 내일도 내 얼굴을 보면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외치실지.
+ 뒷 이야기)
반년쯤 후에, 친구의 술자리에 초대를 받았다.
한참 술을 마시다가 작년에 탈장수술을 받았는데~~ 하는 이야기를 그냥 들었는데,
대화중에 숙취해소제 연구 이야기가 나왔다.
- 혹시.. 부모님이 엄청 크게 인삼농사 짓지 않으세요?
- (소름돋는 표정..) 어떻게 아세요?
- 저한테 인삼주기로 약속하시고 왜 안주세요? ㅎㅎ
- 제가요??
사실 그 약을 맞은 사람과 -특히 내가 직접 주었던 사람과- 뒷이야기를 해본 것은 처음이어서 정말 기억을 못할지 궁금했다. 그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줄 알았는데, 내 이야기를 들으니 수면제 맞고 이야기하던 장면이 드문드문 기억이 난다고 했다. 왜 그런지 모르게 말이 술술 나왔다고 하며 다시한번 부끄러워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