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내담자

존재를 지우는 법을 먼저 배운 아이에게

by 송지영

말도 안 되는 먼 거리를 걸어와 도움을 요청하는 소녀가 있다. 가방에는 과다복용하면 생명을 위협하는 진통제를 가득 넣고서. 끊임없이 사라졌다 나타나고,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거짓말과 진실의 경계 역시 스스로 붙들지 못한다. 위탁가정의 언니를 집요하게 스토킹 하고, 그 집에 배설물을 남기고, 현실에 없는 인물을 만들어 대화한다.

이 아이가 “도와달라”고 말하는 순간, 질문은 단순한 개입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향한 우리의 태도로 옮겨간다.

이런 아이가 “도와달라”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이 아이를 지켜낼 장치가 우리 사회에 실제로 존재하기는 할까.

설령 있다 해도, 그 장치 안에서 끝까지 이 아이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랜 세월 특수교육과 상담치료를 병행해 온 특수교사 토레이 헤이든 조차, 어느 날 자신의 그룹치료실에 나타난 이 소녀 앞에서 선뜻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 맥락이 끊어진 언어, 설명되지 않는 행동, 그리고 겹겹이 숨겨진 비밀. 헤이든은 그 조각들을 퍼즐처럼 이리저리 조합해 보았다. 그러나 관심이 개입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순간, 치료는 한계에 부딪혔다. 엘로이즈는 도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어떤 틀로도 수습되지 않는 존재였다.


엘로이즈는 단 한 번도 신뢰를 경험하지 못한 십 대다. 반복된 유기로 위탁가정과 시설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고, 양아버지에게서 겪은 성적 학대는 강박증과 트라우마등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훼손을 남겼다.

엘로이즈가 자신이 겪은 성적학대를 아이의 언어로 풀어낼 때, 그 묘사는 감당되지 않은 현실의 잔해처럼 흩어졌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동시에 그 문장은 이 아이에게 도달하기엔 이미 너무 가벼운 언어처럼 느껴졌다.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 더 큰 위험이 닥친다는 것을 너무 일찍, 너무 처절하게 배워버린 아이였다. 그래서 엘로이즈는 자신을 지우는 쪽을 택했다. 보이지 않는 아이가 되는 것, 그것이 이 아이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유일한 생존이었다.


<나의 어린 내담자>는 그런 두 사람의 이야기다. 헤이든과 엘로이즈—어른과 아이, 치료자와 내담자, 교사와 학생이라는 관계는 다섯 계절을 지나며 서서히 재편되었다. 이 서사는 극적이라기보다 집요하고, 감동을 앞세우기보다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끝까지 따라가게 만들었다. 엘로이즈가 걱정돼서 밤을 잊고 읽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만남은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과정이라기보다, 한 존재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시간에 가까웠다. 그 과정은 전혀 매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은 실패와 충돌로 채워졌다. 어떤 기법을 써도 효과가 없는 좌충우돌을 겪던 헤이든은, 그 모든 소란 속에서 한 가지를 발견했다. 엘로이즈가 자신과의 세션에서 평범하고 시시콜콜한 시간을 가질 때 미소를 띠고 흥미를 느낀다는 것을. 인지행동치료도, 이완 기법도, 감정 일기도 해내지 못한 변화를 밀크티를 직접 태우고, 카드를 정리하는 등 도움을 주는 일을 스스로 해보면서 만들어냈다.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그저 무해한 잡담이었다. 나는 이 시간 자체, 함께 차를 마시면서 수다를 떠는 지극히 평범한 일에 왜 엘로이즈가 적극적으로 반응하는지를 곰곰이 따져보았다. 엘로이즈의 세계에서 ‘평범함’은 안전한 성인과 맺은 일대일 관계일 때 더욱 소중하고 흔치 않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불현듯 엘로이즈에게는 ‘평범함’이 실제로 치료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22p



마지막 계절, 감옥에서 나온 엘로이즈의 아버지가 딸을 집으로 데려오고 싶어 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엘로이즈는 위탁가정을 떠나 아버지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새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고민했다. "저 진짜 가고 싶어요. 그게 문제예요. 정말 그러고 싶어요. 얼마 큼인지 어림도 못 잡을 정도요"라고 두려운 감정을 털어놓으며 소녀는 울먹였다. 처음으로 스스로 방향을 정해 보는 순간이었다. 엘로이즈가 다른 지역으로 떠나면 상담이 종결됨을 아는 헤이든은, 착잡한 마음으로 그녀를 보냈다. 부디 잘 살아내길 바라면서.


"두려워해도 괜찮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인정해도 괜찮아. 그게 네가 영원히 두려워할 거라는 뜻은 아니야." 350p


이 책의 진짜 이야기는 에필로그에 있다. 15년이 흐른 뒤, 어른이 된 엘로이즈는 자기 아이를 데리고 은퇴한 헤이든을 찾아왔다. 그리고 오래 품어왔던 감사를 전했다.


"선생님은 그냥 거기 있어 주셨어요.

사람들이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몰라요.

선생님은 매주 같은 자리에 계셨고, 제가 올 때까지 기다려 주셨어요.

제가 어떤 모습이든, 드러낼 준비가 될 때까지 지켜봐 주셨어요." 375p


이 장면을 읽으며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된 엘로이즈가 아이를 안고 헤이든을 만나는 그 모습이 궁금해서. 모두를 애태웠던 소녀의 성장을 축하해주고 싶어서.

책을 덮고도 오래 남는 것은 결국 하나의 질문이었다.

보이지 않았던 존재가 마침내 보이는 존재가 되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곁에 있을 수 있는가.

이 책은 그것이 가능하다 것을, 끝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