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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지영 6시간전

친하다는 슬픈 말

"어머니는 아이와 친하다고 생각하세요?"

"잘 모르겠어요. 아닌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이가 이렇게 힘든데도 말을 안 해서요. 친하면 속 이야기를 하게 되잖아요.”     


의사의 질문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눈물을 삼키고 있던 나의 울먹임을 터트렸다. "친하냐"는 그 짧은 물음이 꺼이꺼이 울게 하는 말이 될 줄은 몰랐다. 얼마 후, 딸이 내게 물었다.     


“엄마는 우리가 왜 안 친하다고 생각해요?”

“엄마는 너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넌 우리가 어떻다고 생각해?”

“난 괜찮다고 생각해요.”

“J랑 I, E 다 엄마들한테 수시로 전화하고 비밀도 없잖아,”

“걔들이 좀 특별한 거예요. 한국의 친구들은 다 엄마들이랑 그냥 그래요.”    

 

처음부터 우리 사이에 대화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중국 생활은 집과 학교가 전부였기에 3시에 하교하면 집으로 바로 오는 아이와 늘 붙어 있었다. 낯선 땅에서의 시간이 좋았던 이유는, 한국과 달리 아이와 온전히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누군가 우리 사이가 ‘친하냐’고 물었다면, 눈물은 웬 말이며 당연한 걸 묻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딸은 또래 아이들과 조금 달랐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 학년의 소식을 금세 알았지만, 나는 늘 늦게 들었다. 딸은 소문이나 친구들의 이야기를 옮기지 않았다. 아이가 말하지 않으면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고, 캐묻지 않았다. 지나치게 전하는 아이들보다 오히려 내 딸이 더 건강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의 결과를 직면하고 나니, 내 판단이 틀렸던 건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나에게 털어놓고 싶을 만큼 나를 신뢰하지 못했고, 내가 선택적으로만 관심을 준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딸은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 아니, 전혀 다른 아이가 된 듯 보였다. 대화는 내가 질문하고 아이가 짧게 ‘네’, ‘아니요’로 답하는 형식으로 변했다. 짧아진 대답 속에서 딸의 진심을 추측하며 지내다 보니, 나는 마치 독심술사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국 온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아이는 사춘기가 아니라 지속되는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함께 웃고 떠들던 예전의 딸을 그리워하며, 아이의 질환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반면, 딸은 자신이 변한 게 없다고 했다. 그 말은, 우울이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그녀 속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뜻했다.


딸이 떠난 뒤, 아이가 의지했던 선생님이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렇게 죽고 싶었는데 어떻게 버텼냐고 물었더니, 엄마 때문이래요. 엄마가 자기 죽으면 따라 죽을까 봐 올라갔다가도 내려왔다고 했어요.”     

그토록 단단히 숨겼던 마음속에 내가 자리하고 있었다니. 그런데도 왜 우리는 서로를 마주하고 토해내지 못했을까. 그러던 어느 날, 망고 작가님과의 대화에서 나는 비로소 딸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제가 병원 진료를 처음 받는 날, 엄마가 많이 우셨던 게 떠올라요.

힘든 거 몰라줘서,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계속 우셨어요.

그때 저는 엄마에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씀드렸어요.

사실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러면 엄마가 너무 많이 슬퍼하실까 봐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오늘 문득 그때 했던 생각이 떠오르네요.     


내가 힘든 걸 몰라줘서 고마워요. 내가 아픈 만큼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어요.

엄마가 내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고 내 감정에 공감한다고 했으면 내가 훨씬 더 슬프고 속상했을 거예요.

엄마가 내 마음을 몰라줘서, 도와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겐 위안이 되었어요.

고마워요. 나와 함께 아프지 않아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묻혀 있던 기억들이 장막을 뚫고 피어올랐다.     

“엄마만 모르면 돼요.”     

그때는 딸의 진심을 모르고 아이의 침묵이 거부로 느껴져 슬펐다. 그러나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딸은 자신의 아픔으로부터 나를 분리시키고 싶어 했다는 걸. 엄마가 자신으로 인해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을.     


망고 작가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이의 마음 끝자락에라도 다다를 수 있었을까. 심리 상담으로도 풀리지 않던 수많은 매듭들이, 딸과 같은 아픔을 겪은 십 대 소녀의 언어로 풀려 나갔다. 흔히 내리사랑이라며 부모만 자식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 역시 부모를 위해 멈춰 서고, 뒤돌아보며, 자신의 고통이 전이될세라 혼자서 부둥켜안는다. 그것은 연약한 존재가 있는 힘을 다해 지켜주고 싶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고, 동시에 혼자 감당하고자 하는 외로움이었다.


침묵 속에 담긴 마음은 종종 오해로 덮이기 쉽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한 채 엇갈리기도 하고, 때로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치기도 한다. 하지만 한참을 돌아 다시 마주하고 나면 깨닫게 된다. 그 침묵 속에도 서로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결국 중요한 것은 완벽히 이해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끝내 놓지 않고 그저 함께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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