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분 위에 뜬 오늘의 예술

경주 오아르미술관

by 송지영

경주는 나에게 장소라기보다 한 편의 시처럼 스며드는 곳이다. 눈을 감아도 선연히 떠오르는 그 윤곽은, 늘 다시 발길을 이끌어낸다. 언젠가는 꼭 살아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한때는 경주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싶다는 꿈까지 꿨을 정도다.

이 도시를 걷다 보면, 시간이 멈춘 듯한 묘한 정적 속에서, 길 잃은 시간여행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경주의 매력은 단순한 고즈넉함에만 그치지 않는다. 도시는 너르게 펼쳐져 있고, 길은 불필요한 장식 없이 간결해 시선을 방해하지 않는다. 탁 트인 공간을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유려한 고분의 능선들. 처음 찾은 이방인조차 단박에 매료될 만한 장면이다.

경주는 내게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균형미가 뛰어난 도시다. 톨게이트를 지나 도시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어떤 고유한 질서와 아름다움이 감각을 사로잡는다. 경주에 들어설 때마다 터져 나오는 탄성은, 중국 계림의 기이한 카르스트 풍경을 처음 마주한 순간과 닮아 있다. 로마의 길을 걷다 무심히 마주쳤던 고대 유적들처럼, 이 도시 역시 뜻밖의 장소에서 역사를 무심하게 내보인다.


거대한 봉분들은 마치 살아 있는 유산처럼 우람하게 서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둥글고 포근한 곡선들이 전하는 기운은 묘하게도 위압적이지 않다. 오히려 다정한 중력을 가진 풍경처럼, 조용히 끌어안는다. 그 앞에 설 때마다 나는 늘 새삼스레 흥분된다.

외국인 친구가 한국을 방문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경주를 추천한다. 몇 해 전, 영국 친구가 천마총과 첨성대 앞에서 아이처럼 환호성을 지르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1400년 전 세상에 어떻게 이런 우아한 천문 관측대가 존재할 수 있었느냐며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사진 몇 장 남기고 금세 자리를 뜨곤 했던 첨성대 앞에서, 그녀는 한 시간이 넘도록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진지한 눈길을 따라 나 역시 다시 바라보게 되었고, 친숙했던 경주는 사실 무한히 펼쳐진 비밀의 보고라는 걸 깨달았다.


경주를 향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이곳은 내 여행의 기준점이 되어 있었다. 교토를 찾았을 때조차 나는 마음 깊숙이 경주를 그리워했다. 나는 이 도시에 오래도록 매혹돼 있었고, 수없이 찾아도 지루할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계절마다 전혀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그 다채로움이 바로 경주의 진정한 아름다움이었다. 도시의 상징, 대릉원을 품은 미술관이 새로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여행의 행선지는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경주의 고요한 숨결이 머무는 노서동, 그곳에 하나의 이질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건축물이 새로 들어섰다. 오아르 미술관. 이름부터 남다르다. ‘오늘 만나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의 이 미술관은, 그 이름처럼 매일 새로운 풍경을 관람객의 마음에 건넨다. 이곳은 대릉원 고분군 옆에 살포시 자리 잡아 경주의 풍경과 현대미술을 정교하게 엮어내는 감각적 공간이다.


2005년부터 개인 소장품을 꾸준히 모아 온 김문호 관장의 오랜 수집 여정은 2025년 5월, 이 미술관의 개관으로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 오직 컨템퍼러리 아트에 집중한 이곳은 ‘대릉원을 품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미술관’을 목표로 탄생했다. 유현준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은 흔한 화이트 큐브를 벗어나 그 자체가 경주와 깊은 호흡을 나누는 예술품처럼 세워졌다.

미술관 입구에 서는 순간, 유리창 너머로 펼쳐지는 세 개의 고분이 거대한 파노라마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풍경은 관객의 시선을 부드럽게 빨아들이고, 미술관은 그렇게 경주의 시간을 현대의 작품 속으로 품는다. 경주의 시간이 전시의 일부로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 든다.

이곳에서 대릉원의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전시 그 자체로 작용한다. 입구에서는 유리창에 스며든 고분의 모습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전시장에 늘어선 열한 폭의 창은 각각의 프레임으로 고분의 풍경을 담아낸다. 1층 카페의 파노라마형 거울은 병풍처럼 고분의 우아한 곡선을 비추며 공간의 리듬을 완성한다. 관람객은 작품과 풍경 사이를 오가며 감각의 미묘한 층위를 경험한다.


건물의 지붕은 독특한 경사의 흐름을 품고 있다. 경주시 도시계획 조례에 따라 한국 전통의 건축미를 살려야 했던 제약 속에서도, 건축가는 직선과 경사를 절묘하게 배합하여 역동적 지붕선을 완성했다. 천장의 높낮이가 계속 바뀌는 전시장은 그 자체로 공간의 긴장감을 만든다. 층고가 낮아질수록 시선이 집중되며 작은 그림들이 배치되고, 다시 천장이 높아지면서 거대한 작품들이 나타난다. 관람객은 공간의 변화에 따라 작품을 전혀 다른 결로 체감하게 된다.

옥상은 이 미술관의 백미다. 경사진 지붕을 계단처럼 설계해 앉아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대릉원의 고분 세 개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고개를 들면 하늘과 맞닿고, 눈길을 내리면 역사의 곡선이 시야를 휘감는다. 이 자리에서는 경주라는 도시의 유산이 단숨에 시야로 흘러든다.


현재 전시 중인 작품은 포브스 아시아 30세 이하에 선정되며 주목받은 일본의 떠오르는 신예, 에가미 에츠의 작업이다.



그녀는 소통의 불완전성과 그 간극을 시각화하며, 언어의 본질과 그 한계를 집요하게 탐구한다. 작품들은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 언어가 지닌 균열과 왜곡의 흔적들을 굵은 터치와 강렬한 색상으로 표현하며 보는 이를 사유로 이끈다.

지하 전시장에서는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세계적 미디어 아트 듀오, 문경원·전준호의 팬텀 가든이 상영 중이다. 자연과 환경, 지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전복하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이 작품은 관객에게 초월적 시공간의 체험을 선사한다.


고분 자체가 거대한 예술이 되는 이곳, 오아르 미술관은 경주라는 도시의 미학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그 안에서 멈춘 고분의 시간과 감각적으로 흐르는 현대미술의 시간이 서로 얽히는 세계를 거닐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간을 통해 쉼 없이 연결되고 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오래된 것이 새롭게 말을 걸고, 새로운 것이 그 말에 답하는 곳. 오아르는 그렇게 나에게 또 하나의 경주를 보여주었다.


https://youtu.be/sw1y8V5VoLo?si=RxJvNx34UzKieMc3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삶은 어떤 경우에도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