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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예술투어 2

한국근현대미술: 4인의 거장들

by 송지영

판으로 즐기는 네 가지 세계. 여러 가지 토핑을 하나의 도우에 골고루 올린 콤비네이션 피자처럼,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네 작가가 한 자리에 모였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장욱진.
각자의 이름만으로도 전시 한 편이 완성되는 이들을 한 공간에 불러낸 <한국 근현대미술:4인의 거장들>은 말 그대로 지금 아니면 못 보는 조합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환기미술관,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제주도립이중섭미술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서 각각 따로 만나야 할 90여 점의 작품들이 경주 예술의 전당에 걸렸다. APEC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마련된 이 한정판 전시를 보기 위해 경주로 달려갔다. 이전에는 없었던, 국내 최초의 네 거장의 조합에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네 사람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겪었지만, 각자가 그려낸 세상의 얼굴은 전혀 달랐다. 전쟁, 가난, 상실, 가족, 자연. 비슷한 현실을 지나왔지만, 누군가는 점으로 말했고, 누군가는 질감으로 응답했다. 또 어떤 이는 아이처럼 단순하게, 어떤 이는 짐승처럼 격렬하게 그렸다.

<얘들과 물고기와 게> 이중섭, 1950년대

전시는 이중섭으로 시작된다. 거칠고 뜨거운 선, 삶에 밀착된 감정의 덩어리 같은 작품들이 화가의 결을 드러낸다.

1951년, 전쟁을 피해 도착한 제주 바닷가. 가난했지만 웃음이 있었고, 아이들과 보낸 그 1년은 그에게 가장 짧고도 환한 계절이었다. 이 시기의 그림에는 게와 물고기, 웃는 아이들, 행복이 아직 물러나지 않은 장면들이 남아 있다.

<얘들과 복숭아(편지화)> 이중섭, 연도미상

하지만, 1952년 아내와 두 아들이 일본으로 돌아간 뒤 그의 그림은 편지가 되었다. 그리움은 점점 더 조밀해졌고, 떨리는 선의 결에 마음이 스며들었다.

이중섭은 결핍을 감추지 않았다. 고통을 덮지 않고, 그것을 껴안은 채 그림을 남겼다. 그런 그의 고단한 삶이 예술로 연결되어, 그는 한국인이 깊이 기억하는 화가 중 하나다.

<수하> 박수근, 1960년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

박수근은 이 말을, 붓으로 조용히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의 그림에는 허세가 없다. 큰 기교 대신 늘 같은 자리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을 그렸다. 빨래터의 여자들, 장날의 노인, 아이를 업은 엄마 같은 풍경이 담담하게 화면을 채운다.

<유동> 박수근, 1960년대

캔버스를 덮은 회색빛 질감은 마치 비바람을 맞으며 일생을 견뎌온 누군가의 손등 같다. 겹겹이 쌓인 유화의 두께는 그 자체로 고단한 삶의 층위를 말해준다.

박수근의 작품은 그 시절의 사람들을 관찰하여 그렸다기보다 그들 곁에 함께 살며 그려낸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소박하지만 낡지 않았고, 따뜻하지만 감상에 흐르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을 다정하게 바라보던 시절의 온기. 그건 지금도, 그의 그림 안에 남아 있다.

김환기 에세이

이번 전시에서 유일하게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공간은 역시 김환기의 작품이 있는 곳이다. 서울 부암동의 환기미술관처럼, 이곳에서도 그의 그림은 빛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경이감이 먼저 온다. 이 전쟁과 가난의 시절에, 어떻게 이런 추상이 한국에서 가능했을까.

김환기는 한국의 자연과 전통을 자신만의 추상 언어로 풀어낸 거장이다. 그의 그림엔 계절의 색이 있고, 달빛과 바람 같은 감각이 있다.

그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높은 경매가를 기록한 작가지만, 이런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그의 국적이 한국이 아니었다면, 피카소처럼 세계 미술사에 더 크게 이름이 새겨지지 않았을까.


서울-파리-뉴욕. 그의 여정은 공간마다 결을 달리했고, 특히 뉴욕 시절의 ‘점화’는 사유와 감각이 가장 정제된 순간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면, 그 증거가 바로 김환기의 그림일 것이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지평을 확장해 낸 사람이다.

다만, 이번 전시에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점화’ 시리즈가 빠져 있다. 몸값이 다른 작가라는 점이 영향을 미친 거겠지만 컬렉션 구성은 다소 아쉬웠다. 그의 깊이를 아는 이들에게는, 조금 얕은 전시일 수도 있겠다.

<까치> 장욱진, 1958

장욱진의 작품에는 나무, 집, 새, 가족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까치는 700여 점에 이르는 그의 유화 작품 중 440여 점에 등장할 정도로 그가 애정하던 대상이었다. 작가 스스로도 “난 까치를 잘 그립니다.”라고 할 만큼 오래, 자주, 다정하게 그려낸 존재이다. 그는 아이처럼 단순한 형태로 자신이 사랑한 세계를 그린 작가이다.

<호도> 장욱진, 1975

“작은 그림이 감상에 더 적절하다.”
그의 말처럼, 캔버스는 크지 않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세계관이 오롯이 담겨 있다. 색은 평평하고, 형태는 단순하지만, 그림은 결코 얕지 않다. 그 안에는 물아일체의 동양적 사유, 삶에 대한 철학, 그리고 가족과 집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다. 그의 작품을 보고 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닐까 하는.


네 명의 그림을 보고 나니, 한 시대를 산다는 건 자신의 방식으로 바라보고 기억한다는 뜻 같았다. 같은 시간을 통과해도, 누구는 점을 찍고, 누구는 선을 긋는다. 그림은 그 차이를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 다름이, 이번 전시의 가장 빛나는 부분이었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나의 시대를 기억하게 될까. 어떤 시간을 지나왔든, 그 끝은 유쾌하고 환하게 담길 수 있으면 좋겠다.


*APEC 정상회의 기념 2025 한수원아트페스티벌 X국립현대미술관

한국 근현대미술: 4인의 거장들

일시 : ~ 2025.. 10.12

장소: 경주예술의전당 알천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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