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아코 보아포 전시회
2005년 부산 이후 20년 만에, APEC 정상회의가 다시 한국을 찾는다. 가을이 절정인 10월 31일, 세계 21개국의 시선이 지붕 없는 박물관 경주를 향한다. 지금 경주는 새단장으로 바쁘다.
내 최애 도시가 세계 무대에 어떤 얼굴로 데뷔를 할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괜찮은 전시들이 잇따르고 있어 경주를 방문할 이유가 늘어간다.
그중 가장 기대되는 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릴 ‘신라금관 특별전’이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신라 금관 6점이 1921년 ‘금관총 금관’ 발굴 이후 104년 만에 처음으로 함께 전시된다. 역대급이란 말은 이럴 때 제격이다. APEC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이 특별전을 절대 놓치지 마시라. 10월이 벌써 기다려진다.
기다리다 지치기 전에 오늘 재오픈한 우양미술관부터 다녀왔다. 그곳엔 지금 미술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 아모아코 보아포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우양미술관은 1991년 보문단지 힐튼호텔 안에 선재미술관으로 시작했다. 2013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꾼 뒤, 작년에 리노베이션을 위해 긴 휴식에 들어갔다. 바로 오늘,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다시 문을 열었다.
밝은 채광과 화이트 톤이 조화를 이루며 새롭게 단장한 갤러리는 한층 정제된 인상을 준다. 불필요한 장식 없이 알맞은 여백과 조도가 작품의 분위기를 잘 받쳐준다.
재개관 첫 개인전의 주인공은 가나출신 화가 아모아코 보아포다. 단기에 주류 미술계에 이름을 올리는 일은 흔치 않은데, 그의 등장은 미술 시장에 뚜렷한 파장을 일으켰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아티스트의 작품을 이 조용한 도시, 경주에서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선하다. 회화부터 영상, 설치 작업까지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개인전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아모아코 보아포의 작품은 모두 인물화지만 단순한 초상이 아니다. 그림 속 얼굴들은 이름 없는 누군가가 아니라, 고유한 존재로 서 있다. 검은 피부를 손끝으로 빚은 질감, 화려한 배경과 의상, 선명한 눈빛과 표정들이 한 화면 안에서 충돌하고 어우러진다.
작가는 붓 대신 손가락으로 얼굴과 손을 그린다. 검은 피부에 남은 흔적은 지문처럼 생생하다. 그 결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의 손끝이 머물렀던 자리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흑인이다. 그들은 '흑인의 얼굴' 같은 집단을 대변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얼굴, 저마다의 리듬으로 캔버스를 응시한다.
비엔나 유학 시절, 보아포는 클림트와 쉴레의 작품을 공부하며 두 거장의 화풍을 자신만의 색채로 녹여냈다. 화려한 장식성과 유기적인 선, 그리고 심리적 밀도의 결이 교차하여, 학계와 평단에선 그를 ‘검은 클림트’라 부르기도 한다.
비엔나 분리파의 금빛 장식성과 유기적인 선, 쉴레의 불안한 얼굴과 안쪽을 응시하는 시선. 그 모든 계보가 보아포의 캔버스에서 새롭게 재현된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물 그 자체보다 그 너머의 감정이 궁금해진다. 쉴레의 그림 앞에서 느꼈던 감정이, 보아포의 화려한 터치 안에서 다시 떠오른다.
이번 전시의 제목 ‘I have been here before’는 작가가 되뇌어온 말이자, 그가 걸어온 길의 정서적 요약이다. 흑인으로 존재한다는 정체성과 그 안의 기억들이, 그 어떤 정치적 언어보다 더 직관적이고 강하게 드러난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공간은 전시의 마지막 섹션에 설치된 ‘A Space for the Divine’이었다.
가나 출신 건축가 글렌 드로쉬와 보아포가 협업해 만든 ‘Nsaa Pavilion’은 한국 전통 한옥의 마당 구조와 아프리카 자수 문화를 결합한 설치 작업이다. 힙합이 잔잔히 흐르고, 회화와 건축, 사운드가 하나로 겹쳐지며 경계없는 예술의 확장성을 보여준다.
디올과 같은 이름 있는 브랜드가 그에게 손을 내미는 이유를, 이 공간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시대가 원하는 감각을, 그는 정확히 알고 있다.
1 전시실에는 선재미술관 시절부터 소장해 온 백남준의 작품들이 소개된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 '전자 초고속도로–1929 포드'. 자동차와 한국 전통 가마가 결합된 대형 설치물로, 이동과 정체성, 기술과 전통이 하나의 구조 안에서 대립한다.
'나의 파우스트’ 연작 중 '경제학'과 '영원성' 편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선재미술관 시절 처음 만났던 그의 작품을 어른이 되어 다시 보니 기분이 묘했다. 한때는 낯설고 난해했던 작품들이 이제는 노스텔지어를 자각하며 다가왔다. 예술도 나도, 그만큼의 시간을 지나온 셈이다.
경주는 늘 오래된 것 만을 보여주는 도시는 아니다. 아모아코 보아포의 전시처럼, 이 순간의 감각도 놓치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경주는 갈 때마다 새롭게 다가온다. 다가올 APEC 정상회의에는 또 어떤 얼굴로 나타날지 기대된다.
#Amoako Boafo 아모아코 보아포
I have been here before.
우양 미술관
2025년. 7.20~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