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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중과 상연, 자살생존자의 삶에 관하여

by 송지영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 2화까지 봤을 땐 이 작품이 단순히 우정과 질투의 성장일기에, 룸 넥스트 도어 같은 조력사망 테마를 얹은 드라마라 생각했다. 그러나 3화에서 대학생이 된 은중(김고은)이 사진동아리에서 “상학”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얼어붙고 도망치는 순간, 이야기는 전혀 다른 색깔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사진 동아리 출사에 나선 날, 연락이 닿지 않는 상학(김건우)을 보고 은중은 불안에 휩싸인다. 그가 무사히 나타나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끝내 뱉어낸 말.

“죽은 줄 알았단 말이에요.”


그 울음 속에서, 중학교 시절 첫사랑이자 상연(박지현)의 오빠였던 천상학이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제야 이 드라마의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프로모션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이 내러티브는 작품을 이끄는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다. 이야기 속에는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더듬는 흐름과, 상실 이후의 삶을 감당해야 하는 여정이 나란히 놓여 있다.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풍경은, 자살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현실의 단면에 가깝다.

큰 기대 없이 본 이 작품의 3화에서 한참을 멈춰야 했다. 엄마가 외출 중 연락이 닿지 않던 밤, “혹시 무슨 일이”라는 최악의 상상으로 새하얗게 밤을 지새웠던 내 기억이 겹쳤기 때문이다. 한 번의 상실을 겪고 나면, 모든 부재가 재앙의 전조처럼 다가온다. 다음날 새벽 여섯 시, 엄마가 전화를 걸어와 말했다.

“놀랐지. 네가 걱정할까 봐 날 새자마자 휴대폰 찾아온 거야.”


이렇게 남겨진 사람들의 세계는 늘 불안의 공기로 가득하다. 상연의 서사는 그 증명이다. 완벽해 보였던 아이는 오빠의 죽음 이후 무너진 가정 속에서 버텨야 했다.

“다른 엄마들은 남은 자식 보고라도 산다는데, 엄마는 왜 그러냐”는 상연의 울부짖음은, 떠난 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신을 보고 함께 살아가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고통과 동시에, 남아 있는 자신이 지워지는 이중의 상처. 그녀의 외침은 애도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 장면을 보며, 작가나 연출가 중 누군가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이 아픔을 겪었으리라 짐작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촘촘하고 섬세하게 포착할 수는 없을 텐데...


상연의 길은 끝내 황폐했다. 어머니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철저히 홀로 남겨졌다. 풍비박산 난 집, 가난의 무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죄인으로 만드는 기억들. 사랑받던 이를 질투하면서도 그리워해야 하는 모순이 그녀를 옥죄며, 은중과의 관계마저 불운의 굴레로 묶인다.

그녀는 오빠가 떠나고부터 줄곧, 오빠의 죽음의 이유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대학 진학도, 사진동아리도 결국 그 흔적을 좇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사람은 ‘왜’라는 질문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 집착은 날마다 고통을 키우지만, 동시에 언젠가는 숨통이 되기도 한다.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 더는 미궁을 헤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주변 인물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를 감춘다. 은중은 묻고 싶어도 삼킨다. 자신의 아픔은 접어둔 채, 친구의 고통 앞에서 작은 존재처럼 물러난다. 상학 역시 좋아하는 형을 잃고, 슬픔을 지닌 채 살아가는 상연을 모른 체할 수 없어 은중에게 비밀을 만든다. 누구도 속내를 다 털어내지 못한 채,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이어간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드라마는 어떤 다른 작품보다 진실하다. 죽음은 죽은 자의 것이 아니라 산 자의 몫이라는 사실. 남겨진 그림자를 짊어진 채, 이해되지 않는 고통을 안고 걸어가야 하는 지난한 삶의 풍경을 보여준다.

다만 13화 이후 상연의 지나친 흑화는 '은중과 상년'이라 불릴 만큼 시청자에게 불편함을 주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깊은 상처를 가장 가까이서 함께해 온 은중에게 향한 마지막 걸음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은중과 상연>은 자살생존자의 삶이 지나야 하는 황량한 들판을 비춘다. 애도는 눈물로 닫히는 문이 아니라, 날마다 열어야 하는 창문과 같다. 매일의 선택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삶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어제보다 덜 원망하고, 오늘을 조금 더 견뎌내는 선택. 삶은 그 작은 결심들의 합으로 이어진다.
상실이 만든 황무지 위에서도, 사람은 서로를 붙들며 걸을 때에야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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