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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Feb 26. 2021

하고 싶다면,  당신이 먼저 시작해봐요

유일한 스터디, 넌 나의 유일한 파티원

인상적인 사람

인상적인 말들


  Z는 뭐랄까, 귤 같은 사람이다. 1학기 때부터 일주일에 한번씩은 Zoom 화면으로 마주치긴 했지만, 좀체 알수 없는 사람이었다.(알 기회도 없었지만) 카메라를 늘 조금 아래 방향으로 두어 얼굴도 인지하지 못했다. 우연히 한 번의 대면 수업이 열린 그 날, 바로 옆자리에 앉은 Z에게 똑똑 노크하고 말을 걸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얇고 노란 껍질을 확 벗었다.     


“느루양 선생님이시죠?”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청량하게.      


“잠깐 나가서 얘기나 좀 할까요?”     


  Z는 나에 대한 얘기를 이미 J에게 들었다고 했다. 함께 기록관에 다녀온 나의 유일한 동기 J. 그는 1학기 때 Z와 같은 수업을 들었는데, 놀랍게도 그 수업은 내내 대면 수업을 하는 바람에 J와 Z는 금방 가까워졌다. 사실 일전에 J는 나에게도 당부해두었다. Z를 만나게 되면 꼭 얘기해보라고.


  J의 적극적인 중매 덕인지 Z는 나를 만나자마자 쉴 새 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교에 대해, 공부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쉬는 시간에 잠깐, 고작 10분 쯤 대화한 것인데 이렇게 기승전결 없이 본론부터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참으로 오랜만이라 인상에 남았다.      


  그리고 이 수업도 이내 비대면으로 전환되었다.      


  Z는 나보다 하나 윗 기수다. 그 이후로 가끔 카톡을 주고받긴 했지만, 딱히 교류할 일이 없었다. 늘 ‘얼른 코로나가 끝나서 만나면 좋겠네요’라는 말을 인사처럼 했는데, 그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 상황이었다.)      


“쌤, 두 명이 만나는 건 괜찮지 않을까요? 수요일날 점심 드실래요?”      


  반가운 제안이었다.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것이 태산이었으니까. J의 회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이때도 서로 격려나 덕담, 걱정 같은 것들을 나누는 평범한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그는 인상적인 말을 불쑥 내뱉기도 했다. “저는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 가거든요. 우리 오래오래 봐요.” 같은 말들.

      

  그러다 자연스럽게 대학원 생활에 품었던 로망 같은 걸 나눴다. 대학원생이 되면, 교수님과 프로젝트 같은 걸 하면서 밤도 새고, 연구하는 기분도 내고, 신랄한 토론 수업 같은 걸 할 줄 알았다는 얘기.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스터디도 하고, 학문을 논하고, 좀 더 근사한 대화를 나누게 될 주 알았다는 바람. 대학원에 와서도 취업과 시험 얘기만 하다 졸업하게 될줄은 몰랐다, 뭐 그런 시시껄렁한 얘기들 말이다. 늘 말로만 해왔던 것들.      


그렇게 점심 먹고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헤어지는 길이었다. 교차로에서 작별인사를 건네며 Z가 말했다.      


“쌤, 그거 쌤이 먼저 시작해 봐요.”

“뭘요?”

“스터디 같은 거요. 쌤이 하고 싶다고 한 거.”

“스터디요?” (사실 구체적으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저도 하고 싶었거든요. 제가 나서지는 못하지만, 쌤이 한다면 저도 같이 할게요. 그건 우리끼리도 시작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Z는 갔다. 그리고 2학기가 지났고, 2020년도 흘러갔다.


새해가 되었을 즈음, Z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먼저 시작해보라는 말.     


돌이켜보면 1년 동안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일이든 공부든 내게 먼저 제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학이라도 이 학교 출신이었으면, 교수님이나 동기나 어떻게든 인맥이라도 있었을텐데, 조교라도 했으면 어떻게든 얼굴 좀 비출 수 있었을 텐데. 또 사실 그렇지 않은가. 아무 기반도 없고 날 아는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누가 나를 불러서 일하라고, 공부하자고 제안할 리도 없잖은가.


일년 동안 학교에서 배운 것은 사실 이거다. 아무도 기회를 떠먹여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불평만 하고 싶진 않았다. 인삿말처럼 외워대는 대학원 로망 하나쯤은 이뤄보고 싶었다. 그 중에서도 학교에서 배우는 정해진 범위의 공부 너머, 폭넓게 기록과 아카이브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우리 해볼까요.

스터디?     


  그렇게 Z와 스터디를 하기로 했다. 나보다 한학기 앞서 공부한 Z는 확실히 더 많은 논문과 책을 알고 있어서, 서로의 관심사가 닿는 주제로 교재와 논문을 정했다. 그리고 이왕 스터디 하는 거라면, 서넛은 있어야 서로 동기부여도 되고 끝까지 할 수 있을 테니 사람을 모으기로 했... 지만 아싸인 나와 인싸지만 마지막 학기인 Z로서는 무리였다. 몇몇 친구들에게 이야기는 꺼냈지만, 일이나 육아가 바빠서, 혹은 이 주제에 관심이 없어서, 혹은 시험공부가 급해서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둘이서 스터디를 시작했다.     


  스터디 자체를 어떻게 해나가얄지 몰라 처음에는 어떤 기대도 없었다.      


  수업 때처럼 각자 발제를 하는 게 좋을지, 한 파트씩 맡아서 읽는게 좋을지. 하지만 해보면서 답을 찾아갔다. 책을 한 장씩 서로 읽고, 관련 논문을 찾아 공유하고, 짧게라도 의견을 담은 페이퍼를 썼다. 거리두기가 완화되어 카페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매주 만나 한 장씩 공부하며, 종일 ‘기록’이나 ‘아카이브’ ‘데리다’ ‘전시’ ‘프로이트’ 등을 떠들어댔다.      


그런데 이거, 되게 재미있었다.     


스벤 스피커의 <빅 아카이브>를 읽었다


  그러니까 데리다의 <아카이브 열병>을 시작으로 뒤샹, 르 코르뷔지에 등 미술사 영역에서의 아카이브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살펴보고 있는데, 미술사에서 '아카이브' 개념이 나에게 완전히 미지의 땅을 밟는 기분처럼 새로웠다. 기록학에서 말하는 출처주의, 진본성 따위는 놀이로 뭉개버리고, 끊임없이 우연을 기록하고 부재를 기록해온 예술가들의 활동은 수업 때 전혀 배우지 못한 개념으로 뻗어나가 아카이브에 관한 매혹적인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Z와 나는 난해한 문장들로 가득찬 책의 한 챕터를 읽어와 마치 추리소설 속 암호를 해독하듯 머리를 맞대고 읽은 내용을 정리했다. 우리가 배운 것과 한번도 배우지 않은 것 사이를 경험과 상상으로 한땀한땀 연결해가며, 이 난해한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또 미술사에서 변주된 '아카이브' 개념이 기록학 실무에 반영할 수 있는 부분은 없는지 토론했다.


  정말 답도 없고 정도도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서너시간 수다를 떨었다. 다른 게 아니라 아카이브, 이거 하나 가지고 이렇게 하루 종일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미있다. 그래, 이런 걸 기대했고, 이런 재미를 꿈꿨다. 누가 우리 대화를 듣고 있으면 뒷목을 잡을지도 모르겠다. 아카이브가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를 절래절래 저을지도 모른다. 내가 고작 1년 공부해서 떠드는 소리니, 아마 엉터리로 이해해서 다음학기 공부를 할 때 더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때그때 발견한 내용을 공유하고, 새로 나온 논문을 함께 읽고, 서로의 논문 주제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공유하는 이 관계는 내게 더없이 이상적이다. 대학원에서 고작 한 명의 친구를 사귀긴 했지만, 그야말로 최선의 친구를 얻었다. 매일 서로 ‘덕분에’를 외친다. ‘선생님 덕분에, 대학원 온게 실감나네요...’ ‘선생님 덕분에 공부란 걸 하네요...’ ‘덕분에 책 한 권을 이렇게 읽네요.’ 아름다운 관계다.


나의 2학기 겨울 방학은 Z덕분에 알찼다. 시작하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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