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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Mar 03. 2021

정교수의 '아빠찬스'를 보고 나는 깨달았다

쓸데 없는 짓과 쓸데 있는 짓을 구분하자

   내가 유일하게 매일 꾸준히 하는 일은 트위터에 접속하는 일이다. 며칠 전 트위터에서 정만식 교수라는 자의 아들자랑 트윗을 봤다. 후폭풍이 거세 결국 정교수는 트위터에서 탈퇴했고, 일파만파 번진 이 사건은 어제 9시 뉴스에까지 나왔다. 이 트윗을 처음 봤을 때 굉장히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고, 그날 밤까지 이런 저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남의 눈치를 좀 

 보지 말자


 3월을 앞두고 나는 그런 다짐을 했다. 눈치 안보는 척 쿨한 척 하면서 사실은 카톡방이나 Zoom 수업방에서 눈치를 보게된다. 단체 카톡방에서 교수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사합니다. 교수님’ ‘늘 감사드립니다’라고 인터넷 너머로 90도 인사를 하는 게 왠지 내키지 않아서 침묵을 지키다가도, 어떤 교수님의 공지에 아무도 답문이 없으면 어쩐지 신경이 쓰인다. ‘이 교수님은 신망을 잃으신 건가. 안녕하세요, 운만 띄워도 감사인사를 받는 교수님들이 있는데. 왜 사람의 공지에는 아무도 알은 척을 안 하지, 나라도 대답을 할까 말까.’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자꾸 하곤 했다.


  이렇게 구구절절 쓰고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 부끄러울 정도지만, 사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고 아주 순식간에 벌어진다. 나는 왜 이렇게 행동하는 걸까? 왜긴 왜야. 눈치를 보는 거지. 그저 말 한마디에 꾸벅꾸벅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면서도, 누군가가 공지의 의무를 이행한 일을 무시하고 싶지 않은,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은’ 부질없는 욕망. 수업시간에도 마찬가지다. 답을 틀리고 싶지 않은 욕망, 튀고 싶지 않으면서도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 이왕 드러낼 거면 완성된 문장으로 잘 드러내고 싶은 욕망, 욕망, 욕망, 아무도 관심 없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이 부질없는 욕망 때문에 수업 시간에 말 한마디 할 때나 카톡을 주고받을 때 나는 자꾸만 멈칫하게 되는 것이다.       


  카톡이 수시로 울리는 게 귀찮아 무음 처리를 해두고는, 나는 카톡방에 오가는 어떤 정보를 놓칠 새라 자꾸 들어가서 새로운 소식이 없나 확인 한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오갈 때는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 추론하기도 한다. “갑자기 왜 이 사항이 결정된 거지? 이런 안건이 애초에 공지가 됐나?” 애초에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얘기다. “단체방이 너무 많이 생겨서 무슨 말 하는지 전혀 몰라요. 다 보지도 않고요.”라고 푸념하는 친구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 눈치같은 거 보지 말자. 뭔가 놓칠까봐 전전긍긍하지 말자. 대답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말고. 나를 기준으로 판단하자, 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 후에 나는 저 트윗을 본 것이다.      




쓸데 없는 짓과 

쓸데 있는 짓을 구분하자


  나는 정교수의 글을 보면서 남의 눈치를 본다는 건 내 소심한 성격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치는 권력이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위치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자리는 정해져있다. 자기 도움으로 아들까지 조교수를 시킨 이 정 교수는 이런 순수한 마음을 전체공개 게시해도 전혀 눈치 볼 필요가 없는 자리에 있다. 이 사람이 성격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이 이제껏 사회에서 겪은 경험과 사람들에게 받은 대접에 근거해서 이런 글을 신나게 써서 올렸을 것이다. 


  저 짧은 글에는 누구의 눈치 볼 필요가 없고, 이제까지도 눈치 보지 않고 살아온 자의 투명함과 순수함이 묻어난다. 나는 과연 내 욕망을 저렇게 투명하게 전시할 수 있는가? 아니, 절대로 못할 것 같다. 아무리 내 스스로에게 ‘눈치 보지 말자’고 외쳐도, 나는 나를 어떤 일에 편입시키거나 배제시킬 수 있는 자들 앞에서 눈치가 보인다. 행여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모두가 ‘감사합니다’를 복창할 때, 슬쩍 나만 빠지지 않았음을 드러내기 위해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라고 카톡창에 적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눈치 보지 말고 살자’는 나에게 썩 유효한 목표가 아니다.      


이 당당한 아빠 찬스 카드를 보고, 최근 내가 쓴 글의 객관화도 빠르게 이루어졌다. ‘대학원은 일했던 놈이 계속하는 구조야. 어떻게든 정보 가까이 가려면 조교가 되자’고 외쳤던 나. 하지만 그런 노오오력이 무색하게 이 세계에는 아빠찬스 같은 넘사벽 카드가 있다. 무시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나경원 아들이나 조국 딸이 뉴스에서 보도될 때는 뉴스 보도의 균형과 적합성 등을 떠올리느라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렇게 이름도 모르는 정 교수의 투명한 트윗을 보니 내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훨씬 실감이 났다.


 ‘우리 아들 내 덕으로 서른한 살에 조교수됐다.’ 그 아들이 실로 훌륭한 자여서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면 이는 훈훈한 미담이 됐을 거다. 하지만 그 아들이라는 자가, 조교수라는 자가 그린 만화, 디씨에 게시한 천박한 글을 보면서(차마 옮기진 않겠다...) 아빠찬스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끔찍하게 와 닿았다. 이에 비하면 내가 시기질투했던(!) 친구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꼭 아빠찬스 말고도 내가 상상도 못하는 수많은 찬스와 카드들이 이 세계에 범람하고 있겠지. 갑남을녀인 나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뭐라도 얻어보려는, 눈치보지 않으려는) 쓸데 없는 노력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황당, 분노, 허무....... 이 모든 감정을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실은 온갖 기대와 가능성이 내 마음을 휘저은 것이다. 카톡방에서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 나도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오히려 일상을 흩트려 놓았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기회가 없어서 내가 뭔가 놓치고 있다는 피해의식도 있었다. 인정한다.


 하지만 사실 다 상관없는 거 아닌가. 눈치나 정보가 얼마나 빠른가는 관계없이 애초에 조교수가 될 사람들은 그렇게 된다. 조교수 대신 조교나 추천생이나 PM이나 다른 단어를 넣어도 관계없다. 어쨌든 그건 내가 애써서 눈치를 보거나 정보를 수집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거다. 피해의식도 아깝다. 바깥의 일은 내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끗이 인정하자.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명확해진다.      


  같은 학교에서 공부할 학생들 눈치를 1도 보지 않는 순수한 정교수나 디씨에 부지런히 댓글을 다는 교수 아들이 적어도 나와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여전히, 앞으로도 무엇이 문제인지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 무의미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고, 기대도 없이 희망도 없이 내 공부를 하자. 엉뚱한 트윗 덕분에 지금의 나를 빠르게 객관화해볼 수 있었다. 3학기는 이렇게 무덤덤하고 담백하게 보내보자고, 이 뜨거운 열정일랑 바깥에 쏟을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달궈 보자고 다짐해보는 3월 첫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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