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내게도 봄이었다
초등학교 운동장 안에 벚꽃이 그림처럼 피어있었다. 그림 같다고 생각했다. 맨날 노트북이나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어서일까. 한 장의 예쁜 이미지처럼 느껴졌다. 버스에 내려서 내리쬐는 햇볕을 얼굴로 느끼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아, 날씨 참 따뜻해졌네.
벌써 3월 말, 개강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처음 해보는 일이 많은 3월이었다.
지난 1월, 2월 두 달의 방학 동안 가장 매진했던 일은 구직이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병행할 수 있는 일이 간절했다. 마지막 학기 학비를 충당해야했고, 앞의 글에서 누누이 말했듯, 3학기에는 실무를 병행하며 공부해보고 싶었다. 바늘구멍처럼 한 명, 많으면 두 명의 기록연구사를 찾는 채용 공고가 있긴 있어서, 보이는 족족 지원을 했다. 면접까지 갔다가 학생이란 얘기에 탈락하기도 하고(닝겐, 이력서를 안봤습니까?), 서류에서만 낙방도 여러 번. 그 와중에 풀타임 근무를 염두에 두고 시간표를 짜자니 수업을 제대로 못들을 것 같고. 이런저런 고민 속에서 좀 지쳤다. 새 학기 직전까지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아 시간표를 짤 때만 해도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좀 심통났던 것은 학교 내에서 선발하는 보조연구원 자리까지 경쟁이 치열해서, 이미 학교에서 일해본 친구들에게까지 계속 밀렸기 때문이다. ‘아, 처음 일하는 사람은 어디서 경력을 쌓느냐고요.’라는 말을 여기서도 하게 될 줄이야. 그런데 그 무렵, 눈에 띄는 공고 하나가 있었다. 종로 인근, 내가 이전에 살던 지역의 기록화 사업 공고였다. 대단히 관심 있는 주제라 냉큼 연락했고, 바로 면접 일정이 잡혔고, 20여 분 간의 면담을 마친 후 그 자리에서 결과를 들었다. “우리 뜻이 맞는 것 같으니,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같이 해보죠.”
내 학교 수업 시간표에 맞춰 주3일 출근해서 근무하게 됐다. 그토록 애쓰고 애써도 맞춰지지 않던 시간표가 한순간에 완벽하게 맞춰졌다. 마치 내 자리는 여기였던 것처럼 말이다. 일주일 전에 문서정리 공고나 한 달 전 홍보팀 공고에 합격했다면, 이토록 매력적인 현장 기록화 작업에 합류하지는 못했을 텐데. 이 구직 경험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1월, 2월의 그 간절함이 여기까지 닿게 한 것일까. 어디엔가 내 자리와 인연이 있으니 먼 미래의 일은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3월부터 종로로 출근했다. 꼭 한번은 일해보고 싶었던(!) 나에겐 너무나 매력적인 공간에 자리 잡은 작고 귀여운 연구실.(연구실이라는 게 있다니!) 더불어 보조연구원 명함도 생겼다. (살다살다 연구원이라는 직책을 갖게 되다니!) 이 명함은 아무리 봐도 낯설다. 이 명함 한 장은 실제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지만, 나에게는 엄청난 정체성과 태도의 변화를 의미한다. 내가 하는 일은 기록 관리 이론을 바탕으로 현장 조사와 문헌 조사를 통해 기록화 작업을 하는 프로젝트로, 들여다보면 볼수록 너무나 나에게 최적화된 일터다.
어제 수업시간에 배운 걸 오늘 일할 때 활용하고, 모르는 건 다시 교수님과 논의하고, 일하면서 느낀 점을 리포트에 녹여내는... 내가 꿈꾸던 일과 학업 시스템을 구축했다! 정말 나만 잘하면 되는 거잖아. 물론 일도 공부도 수월하지 않고, 내 몸과 머리가 기대한 만큼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주지 않아서 고단한 일이 많지만....... 그럼에도 출근할 때 한번, 퇴근할 때 한번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3월을 보냈다. 공부가 나의 주업인 것도, 공부가 일이 되고 동시에 일이 공부가 되는 이 환경이 너무 즐겁고 감사하다.
일을 하면서 장인들을 많이 만나고, 완전히 다른 삶을 골똘히 들여다보게 되고, 한 번도 써보지 않은 말들을 접하고, 골목골목 숨어있는 맛집에서 종종 술도 얻어먹는다. “나이? 마음이 따라 늙을 필요가 없어.”라는 사장님들의 근사한 말도 슬쩍 수집한다. 나의 고용주님과 '기록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원리 원칙을 고민하는 것도 큰 재미다. 나의 사랑 종로가 다시 출근길이 되고, 청계천길이 나의 점심 산책로가 된 것도 기쁘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네가 연구원을? 넌 연구랑은 안 맞아보이는데.’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진작에 연구를 했어야지. 너는 딱 연구 체질이야.’라고 했다. 이 말은 둘 다 맞다. 내가 생각해도 가만히 앉아있는 걸 제일 어려워하는 내가 연구라니 싶기도 하고, 마음 가는대로 깊게 파서 나만의 영역을 만드는 걸 좋아하는 성미를 살려 연구를 잘 해봐야지 싶다. 3월은 그 첫 발걸음을 내딛는 달이었다.
한 해 동안 매진할 연구 주제를 끙끙거리며 탐색했고, 드디어 지난 주에 논문 주제 발표를 했다. 내 인생 처음 연구계획서 제출도 해봤다.(통과할 수 있을까) 아직은 헐렁해서 앞으로 수없이 뜯어 고쳐질 내용이지만, 주제 칸에 넣을 문장 하나를 완성하는 순간 묘한 짜릿함이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내 주제에 대해 피드백을 받겠다고 떠들어댔는데, 덕분에 좋은 사람들도 소개받고, 책도 추천받고, 좋은 피드백을 받아서 근래에 초심자의 행운을 한껏 누렸다. 진짜 입으로는 이미 연구 다 한 것 같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벽에 부딪힐 것도 잘 안다.
이 모든 일은 결국 안 보이는 길을 찾고, 없는 길을 만들어나가는 걸 배우는 과정인 셈이다. 계속 고민할 때는 고민에 그쳤지만, 이 연구를 해보고 싶다고 구체적으로 선언하는 순간, 확실히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 가장 귀한 배움은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내치는 연구자는 없다’는 것이다. 주변에 훌륭한 연구자들은 내가 도움을 요청할 때 기꺼이 더 큰 것들을 내주었다. 기꺼이 주는 도움 듬뿍 받고, 어서 나도 누군가에게 선뜻 도움을 줄 수 있는 연구자가 되야지.
벚꽃도 없고, 소풍도 없고,
조금도 물러설 곳 없는 시간표의 3월이지만,
내게도 3월은 설레는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