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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Nov 03. 2018

프로직업인은 어떻게 '내 일'을 찾을까?

시간이 필요한 일, 나 스스로에게 해주는 말

며칠 전, 한 친구가 회사에서 일하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분명히 자기의 직함이 있는데, 인원도 작은 스타트업에다가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단계의 조직이라, 일을 하면할수록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 모르겠다는 거다. 그 말인즉슨, 자기가 하려던 일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맞나? 하는 회의감이 든다는 얘기일 거다.


"회사에서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 역시 콘텐츠 매니저라는 직함이 있긴 하지만, 콘텐츠 관련된 대부분의 일을 다 처리하고 있다. 게다가 콘텐츠란 어떤 콘텐츠인가? 우리가 하는 행사를 영상으로 찍고, 그걸 편집한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 또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포토샵을 해서 SNS에 올린다. 내가 제작한 콘텐츠를 여러 페이지에 직접 업로드하고 그 링크를 또 SNS에 올린다. 


한달에 두세번 정도 열리는 정기적 행사를 기획하고, 사람을 섭외하고, 마케팅 문구를 써서 마케팅용 SNS 콘텐츠를 만든다. 회사 브랜딩을 하고, 관련된 팜플렛을 기획하고, 구성하고, 또 글을 쓰고, 가끔은 디자인에도 관여한다. 이밖에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행사를 리뷰하고, 회사 외적으로 관련된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또... 전화를 받고, 비품을 사러 나가고, 회의를 하고, 구성원 인터뷰를 하고. 이것조금 저것조금 하다보면 퇴근 시간이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은 했는데, 왜 이번주에 만든 콘텐츠는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또르르...) 하는 회의감으로 퇴근한다. 


시간만 야속하게 흐르고


왜 이 얘기를 하느냐면, 나 역시 비슷한 고민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회사에 입사한지 2개월차인데, 나름 일을 잘해보겠다는 포부로 시작한지 몇 일 되지도 않아서 이미 밀려있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지금 진행되는 콘텐츠를 제작하는데에도 하루하루가 모자라 일을 '잘 할?'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은 나 뿐이잖아? 나는 하나고 카메라는 두대고, 편집기는 아이맥 뿐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도 너무나 제한적이고, 불만을 하자면 정말 끝이 없고, 이러려고 내가 콘텐츠 매니저인가 싶고... 하는 생각을 첫번째 달에, 적응기간에 했던 게 사실이다. 


스타트업의 일원답게 주도적으로 일을 기획하고, 빠르게 실천하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데 이건 뭐 밀려오는 해야할 일들에 휩싸여... 내가 뭘 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고 콘텐츠를 찍어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살짝 들었지만, 생각에 늪에 빠지기 전에 생각을 털어내고 정신을 차렸다. 내가 누군가. 곧 장장 10년차를 찍을 직업인이자 프로퇴사러 김여름 아닌가? 


프로직업인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상황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가만히 나에게 질문했다. 만약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콘텐츠 매니저가 한명 더 생기면 좀 나아질까? (이미 다년간의 경험으로 이것이 상당히 복불복 옵션이라는 걸 알고 있다.) 만약 내 일 중에서 어떤 것을 정리하면 상황이 좀 나아질까?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의 일의 환경, 작업의 환경은 무엇일까? 그것을 위해 무엇을 요구하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고민해보았다.


막상 그렇게 고민을 해보니까, 내가 '지금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더 잘할 수 있는데'라는 가정법에서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내가 "진짜 해보고 싶은 축제 기획이 있는데, 나에게 과제처럼 밀려있는 리뷰를 좀 덜어주면, 당장 할 수 있을텐데-"라는 가정은 가능하지만 "내 일을 좀 덜어주면, (무엇을?) 더 잘할 수 있는데.'라는 말은 유효하지 않은 말 같다고 느껴졌다. 이건 그냥 "내 일이 좀 많은 것 같아. 더 잘하고 싶은 걸 생각해보고 싶은데(...의욕도 없고 시간도 없네)" 정도의 말일 뿐이다. 


과연 지금 업무를 좀 줄이면 어떤 것이 더 나아질까? 내 능력을 과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 내 일을 유도리있게 줄이거나 처리할 수 있는 것이 나의 능력이 아닐까?(왜냐하면 나는 주니어는 아니고 프로직장인이니까) 나의 일차적인 결론은 그거였다.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것, 없는 것을 자주 생각한다


생각이 그렇게 정리되고 나니, 한 방향의 목소리가 계속 귀에 꽂히기 시작했다. 역시나 공공그라운드 공공작당에서 나만의 일러스트 그리는 기술을 전수해주신 설동주 작가님은 이런 얘기를 하셨다. "나의 아이덴티티가 담긴 나만의 그림을 그리자. 그런데 나의 아이덴티티가 뭘까? 답이 금방 나오지 않더라고요. 생각해보니까 내가 그림을 그렇게 많이 그리진 않았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내 그림을 많이 그려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며칠 전 한 대표님과의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매니저를 넘어선 디렉터로서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개인은 무엇을 노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자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일에 관한 고민이 많을 시기라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 많이들 물어본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모습은 아직 그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모습인 경우가 많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지금 맡은 일부터 잘 해보세요. 라고 돌려보낼 때도 많다. 80프로만 해도 일터에서는 큰일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높은 자기 기준으로 120퍼센트 자기 일을 해낸다. 그런 사람들이 전문가의 길로 간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그림을 

그렇게 많이 그리진 않았더라고요


나는 요즘 시간이 필요한 일에 관해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들은 위 두가지 얘기가 똑같은 이야기로 들렸다. 과연 지금 내가 불만족하는 나의 모습, 나의 능력, 나의 결과물이 과연 환경에 의한 것일까? 같이 일하는 사람이 부족해서일까? 나에게 시간이 부족하고, 내 컴퓨터의 사양이 부족하고, 나에게 그저 기회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 고작 입사 2개월차인 내가 지금 뭔가 대단한 콘텐츠로 모두를 놀라게 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오히려 성급한 건 아닐까? 더 나아질 거지만, 굳이 이렇게 나 스스로를 불편하게 하고 불필요한 자괴감에 빠질 이유가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어쨌든 조직에 들어왔고, 어떤 규모의 어떤 조직에 들어가도 그저 만족스럽기만 한 회사는 (아마도) 없지 않을까? 내가 정말 여러군데 다녀봐서 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다. 어쩌면 여기. 내가 선택한 이 곳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낼 수 있는 정도가 진짜 내 실력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꼭 강박적으로 내가 최고의 실력이 아니라고 해서 나 스스로 괴롭힐 일이 아니다. 지금의 일하는 가운데 배우는 게 있고, 나아지는 게 있고, 내 스스로 무엇이 변하고 있는지 정신차리고 그 흐름을 읽고 느낄 수만 있다면, 그 가운데 혹 즐거움도 있다면, 만족할 일이 아닐까. 그렇게 조금더 일하다보면 더 나은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얘기를 친구에게 해주고 싶었지만, 미주알고주알 잔소리같기도 해서. 그냥 여기다 적는다.  


시간이 필요하다. 너무나 진부한 충고지만, 왜 시간이 필요한지 충분히 이해하고 나니 지금 나에겐 그보다 위안이 되는 말이 없더라. 이건 온전히 나 스스로에게 하는 충고다. (내일의 내가 일에 지칠 순 있어도, 괜한 고민 때문에 지치지 않도록) 나는 지금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지금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조직에서 내가 뭘할 수 있는 사람인지 지금 꼭 정확한 답을 몰라도 괜찮아. (내가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인지는 잘 아니까.) 난 정말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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