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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Nov 07. 2018

제안을 잘 해보자는 제안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이 전부는 아니다

다짜고짜 인터뷰 제안


  아침에 출근해서 동료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오늘 하루도 시작해볼까.' 하려던 찰나, 낯선 친구 하나가 내 앞에 섰다. 어제 연락한 S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했다. 응? 네? 무어? 몇번의 짧은 질문을 통해 기억을 해냈다. 그래, 어제 나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 자기는 "S대학 학생인데, 젠트리피케이션 취재를 하는데 (다짜고짜) 대표님 인터뷰를 할 수 있겠"느냐. 정말 워딩이 그랬다. 그래서 일단 메일로 내용을 담아 요청해주시면 좋겠다고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거기까지 기억이 나는데, 자기가 그 S대 학생이라는 친구가 오늘 아침 내 자리에 와 있는거다.


"그래서...요?"


그래서 자기가 어제 메일을 보내고, 다시 전화를 했는데도 통화가 안되고, 오늘 아침에도 전화를 했는데도 통화가 안되서 (이 이른 아침에) 찾아왔다는 거다. (하지만 이 친구가 돌아간 후에 확인해보니, 메일은 퇴근 후인 8시 이후에 왔고, 전화번호도 밤에, 오늘 아침 출근도 전 시간에 찍혀있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지금 하자는 것인지, 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러 온 것인지 다시 물으니, 인터뷰를 해줄 수 있는지 꼭 확인받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밤늦은 제안과 너무 이른 확인 탓에 대표님께 전달할 시간이 없었으니, 오늘 중에 메일로 회신을 하겠다고 말하고 돌려보냈다. "간절히 원해요."라고 어필해서 어지간히 간절한 것은 알겠으나, 조금 대책없는 열정이로구나 생각했다.


안그래도 대표님은 아침 일찍 보낸 메일을 봤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내용 외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서 '뭐지?' 싶었다고. 나도 확인해보니, 메일은 정말 전화로 전달한 내용 그대로였다. 나는 간단하고 건조하게 회신을 보냈다. 어떤 내용의 인터뷰인지 사전에 질문지나 간략한 내용을 전달해주세요. 어느 매체에 어떻게 실리는지, 인터뷰를 언제 진행하고자 하는 건지 알려주시면 진행하겠다고. 제안을 받은 사람이 도통 어쩌지 못하게 만드는 이런 제안도 있구나, 하고 넘겼다.




꼭 뫼시고 싶고, 진심입니다! 만


생각해보면, 오늘 내가 오전 내내 한 일이 바로 제안서를 쓴 일이었다. 매달 공공그라운드에서는 공간에 관해 전문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공공살롱'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12월은 휴가같은 달이기도 하고, 교육보다는 축제에 걸맞는 달이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을지로 공간 컨퍼런스'를 진행해 보기로 했다. 을지로는 우리 주변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고, 요즘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가장 흥미로운 장소다.


을지로 곳곳에 특색있는 카페, 펍, 식당, 작업실이 생기고 있는데, 을지로 특유의 낡은 느낌을 고스란히 가져간채 간판도 없이, 원래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을지로의 일부처럼 자리잡고 있는 새로운 공간들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그래서 그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 세 분 정도 초대해서 이야기도 나누고, 직접 을지로에도 가보게 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프로그램 기획도 마치고, 1순위로 모시고 싶은 연사들도 확정되서, 오늘은 그분들께 본격적으로 제안서를 써서 보냈다.


사실 나도 초보 기획자라 기획의 ABC는 모르지만, 내가 듣고 싶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생각해서 프로그램을 짜고, 한분 한분께 정성껏 편지를 쓰듯 제안서를 썼다. 꼭 뫼시고 싶습니다. 진심입니다!!! 제발 저의 이 간곡한 마음을 알아주세요. 메일을 보내고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세 사람 중 아무에게도 회신이 없었다. OTL 내일이면 메일이 오겠지(거절이라도 좋으니, 메일 회신은 좀 해주세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퇴근해서 맛있게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문자가 왔다!



......


이 문자를 보는 순간, 아침에 온 S대 친구가 떠올랐다.

내가 딱 저 톤으로 회신을 보냈더랬지. "인터뷰에 앞서 필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어디에 실리는지 관련해서 설명을 해주세요."(또르르) 뭔가 아까 메일을 쓰던 나의 모습이 번개처럼 오버랩됐다. 나 역시 마음만 앞서 '간절히 원해요'라는 말만 적어 넣은 제안을 한건가. 같은 실수를 한 건가 OTL



제일 궁금해 할만한 것


내가 오늘 제안서에 빼먹은 내용이다. 물론 글 속에 관련 내용을 설명했다고 생각했지만, 명확하게 기재하지 않은 건 실수다. 아차 싶어 스스로를 원망하려고 했지만, 나는 앞전에도 언급했듯 프로직장인이기 때문에, 애꿎게 나를 질책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만이 나아지는 방법이 아니니까.) 하지만 되돌아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내가 오늘 제안서에 빼먹은 내용은 바로 이 행사에 어떤 사람들이 올 것인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이 내용이 왜 중요하느냐면, 내가 제안한 세 사람 중에 회신은 아니지만 그나마 연락을 준 두 분이 비슷한 질문을 하셨기 때문(쿨럭). 그리고 남편이 말했다. "너도 강의같은 거 제안받을 때 항상 물어보잖아. 어떤 사람들이 오느냐고.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냐고" 그렇다. 이렇게 나혼자 골방에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자리라면, 이야기를 할 사람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그 자리에 어떤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듣느냐일 것이다. 나도 청중의 연령대, 성별, 직업군, 이해도에 따라 강의 내용을 조금씩 바꾸기 때문에 "누가 오는지" 늘 묻곤 했다. 그런데도 아까 메일을 쓸 때는 오로지 '제안하는 자'가 되어 글을 썼다. 상대방이 정말 뭘 궁금해할까,를 앞으로는 염두에 두고 제안을 해야겠다. 앞으로 저건 절대 빼먹지 '못할 것' 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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