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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꾸러기 덴스 Jan 26. 2019

당신의 치명적인 약점

르상티망과 인간의 권력의지

르상티망(Ressentiment)이란 말이 있다.
영어인 Resentment (원한)의  프랑스어이다. 
니체는 이를 강자에 대한 약자의 원한, 질투심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합리화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심리학적으로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의 한 방식이다.
이숍 우화의 '여우와 신포도'에서 포도를 먹을 수 없는 여우의 자기변명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런 르상티망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파이(P.I.E) 세대의 양면성을 설명하는데 적절한 심리학 용어이기도 하다.



인간의 권력의지는 악이 아니다.

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SKY캐슬이 종영을 앞두고 있다. 이들의 어떤 의지가 여러분을 설득하였을까?


우리가 지금껏 추구해왔던 가치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여러분들은 무엇에 의지하겠는가? 

아마 자기 삶을 돌아보리라 생각된다. 니체는 '자기 삶을 돌아보면 모든 것에는 의지가 있다'라고 했다. 통상 철학자들은 '삶의 의지'라는 표현을 쓴다.

쇼펜하우어만 하더라도 이런 말을 썼다. 당시 과학기술의 핵심적 패러다임을 가져왔던 다윈도 생존, 경쟁 이런 말을 썼다. 니체는 다시 이 문제를 뒤집어본다.

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인가?  누군가 '나는 권력을 추구한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쉽게 수긍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느낌이 들 것이다.

'Will to Power'에서, 'to'가 중요하다. 우리의 의지는 항상 권력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권력'이라고 한다면 정치적 권력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이것도 권력임에는 틀림이 없다. 정치적 권력의 관점에서 세상을 들여다보면 지배하는 자, 지배당하는 자 이렇게 계급으로 나뉜다.

니체는 권력을 악하다 말하면서도 그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출발한다.

종교적으로 아담이 이브의 유혹을 통해 신의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인간은 해방되었다

권력은 힘, 에너지, 세력 등으로 표현된다. 이것들은 외면적 작용이고, 중요한 것은 내면적 요소라는 것이다.


SKY캐슬 드라마가 아마도 여러분의 권력의지를 자극하였을 것이다. 드라마 인물들의 권력의지를 통해 꿈틀거리는 여러분의 내면적 권력의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당황하면서도 충분히 교감하였을 것이다. 

아래 과정을 거치는 인간의 타고난본능이기 때문이다. 

니체 초상화(Pixabay 무료 이미지:발췌)

내면에서 일어나는 권력의지

아메바조차 권력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외부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동화시켜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바깥과 소통하며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도 숨을 쉬고 있다. 물질교환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1초도 이전의 우리와 동일하지 않다.

권력은 악한 것은 아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권력이 있다.


권력자뿐만 아니라  복종하는 자도 나름대로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active 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reactive 하게, 반동적으로 만들어낸다.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행동으로는 반란할 수 없지만 정신적으로는 늘 반란을 꾀한다. 니체는 이럴 때 Ressentiment(르상티망, 원한 감정)이 생긴다고 보았다. 오늘날 인권도 노예 반란의 모델이다.

 귀족들이 왕과 함께 일반 민중들을 억압하면 어떻게 하는가? 

민중들은 생존을 위해 '모든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새로운 가치, '인권'을 만들어낸다. Reactive 한 가치를 통해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행동은 못하더라도, 머릿속으로 꿈꿨던 자신들의 가치를 무기로 삼은 것이다.


무능의 계략

니체는 '무능력의 계략'이 있다고 보았다. 아무리 능력이 없고 무력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계략이 뛰어나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 자겸 노벨 경제학자인 다니엘 카너먼에 따르면 수십만 년을 거쳐 자연과 상호작용을 통한 인간의 뇌구조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는 인간 뇌구조의 시스템 1이라고 표현한다)  본능이 작용하여 무력감에서 생긴 복수심, 대표적으로 약자들의 가치, 인권, 이웃 사랑을 보편화시키고. 


무력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의 약한 처지와 무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가치를, 거꾸로 우월한 가치로 포장하고 위장함으로써 살아남고자 하는 가치를 '무능의 간계'라고 했다.


자신의 취향과 경험에 집중하는 현재의 파이 세대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달라 보이는가.


권력의 속성은 상호 의존적인 것이다.

아이들에게 말한다. '자유롭기를 원하느냐? 자유로울 수 있는 힘을 가져라! 그렇지 않으면 늘 의존하게 될 것이다. 네 본능과 충동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느냐? 그 본능과 충동을 통제할 힘을 가져라'. 

권력에의 의지 없이는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지지가 않는다. 우리 모두 권력인이 되는 게 어떨까?


니체는 이와 같이 말했다. 내면에 일어나는 어떤 사건들이 바깥으로 나아가는 증상에 불과하다. 건강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아파지는 게 아니다. 항상 징후가 있었지만 너무 다른 곳에 매몰되어 있다 보니 이 징후를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약간 틀어지고 멀어지기 전부터 그 징후는 나타난다. 우리가 포착을 못한 것뿐이다.

우리 내면에는 끊임없는 '권력에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고, 우리가 바깥으로 판단하는 것은 단순한 내면의 운동의 징후에 불과하다.


저항을 느낄 때 권력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언제 권력 감정을 느끼는가?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을 때 권력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권력에 감정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건 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가끔은 일부러 올가미처럼, 저항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기도 한다. 저항이 있으면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고, '살만 하다'라고 하는 게 권력 증대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이 과정을 끊임없이 거친다.

힘의 정도를 확인하고, 의지를 관철시킴으로써 권력 감정을 느끼고, 지금에 이루어진 상태를 넘어서고자 하는 권력 증대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강연할 때, 글을 쓸 때, 업무를 할 때 똑같이 해당된다. 스스로를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를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명체가 살아남고자 할 때 무엇을 한다고 했지? 호흡과 섭취를 통해 바깥의 것을 자기 것으로, 내 것으로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들도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근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의 어원은 라틴어 Dynamis이다. 영어에도 Dynamic이라는 단어가 남아있지 않은가? 활력이 넘친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energeia, 에너지 energy라고 한다. 모든 물체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무엇인가를 일어나게 하는 힘'이 에너지이고, 그것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권력이다.


집단에 새로운 사람을 들였다고 해 보자. 젊은 피를 수혈하면 집단은 활기를 띤다. 만약 신입사원이 들어왔는데도 활기가 안 돌면 그건 사람을 잘못 뽑은 것이다. 권력은 무엇인가를 일어나게 하는 힘이다. 이게 있어야 우리가 창조를 한다.

그렇다면 권력이란 무엇일까? 권력의 특성들은 어떠한가?


1. 권력은 저항이 있어야 실현된다.

내가 명령하는데, 노예가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받들기만 하면 재미가 없다. 싫은 빛이 나와야 한다. 그래도 따르는 것을 보면서 권력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내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저항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복종하는 자도 저항할 수 있다.


2. 권력은 다양한 세력의 관계이다.

관계가 형성되지 않고는 권력이 형성될 수 없다. 두 사람 이상만 모이면 그 순간 권력이 작동한다. 친구 사이에도 권력이 있다.


3. 권력은 통일적인 질서(가치)를 만드는 경향이 있다.

권력은 관계를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게 없다면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통일적인 힘을 뒷받침하는 핵심은 '가치'이다.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 회 이냐가 중요하다.


4. 권력은 항상 새롭게 해석된다.(권력은 인간관 계임으로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우리는 권력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복종하게 되는 상황을 겪는다. 권력은 항상 해석되고 생성된다. 권력을 한 번 가진 자가 늘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복종하는 자가 늘 복종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계를 끊임없이 해석해야 한다.


관계는 끊임없이 해석될 때 그 관계가 지속가능(sustainable)하다. 그런데 고정된 틀로 간다면 그 관계는 죽은 것이다. 살아있는 관계를 위해서는 권력에의 의지가 필요하다.

바람직한 그리고 본능적인 권력의지는

니체는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 제일 권력을 많이 가진 자인가?'를 탐구하기 위해 거꾸로 올라갔다. 맨 밑 복종당하는 사람은 명령하는 자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자들은 가장 권력관계에서 약자이다. 권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항상 정의로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최고로 권력을 많이 가진 사람은 권력이 흘러넘쳐서 상대방이 아무리 저항하고 복종하지 않으려 해도 그것을 관용하고 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넉넉한 힘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권력자(초인)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권력자는 '사랑할 줄 아는 자'라고 했다. '저거 왜 저러지?', '이거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데?'라고 하는 사이끼리는 권력관계가 비등비등하다. 우리보다 월등한 사람에 대해서는 시기 질투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여왕, 스티브 잡스와 같은 사람에 대해 우리는 시기 질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제 친구가 너무 좋은 백을 메고 왔어. 내가 저걸 들어야 되는데', '내 친구가 발표를 너무 잘해'라며 질투가 작동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권력이 흘러넘치는 사람은 시기 질투를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허용하고 관용한다. 이 경우에는 active, 능동적인 의미의 사랑이다. 기독교적 사랑은 반동적이고 교리를 따를 뿐이다. 그래서 니체는 '너희들의 삶의 권력은 의지다'라고 했다. 


니체는 '네 내면을 들여다봐라, 그것이 네 권력에의 의지다.'라고 했다. 그것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오히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극복하는 힘을 얻게 될 것이라 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니체의 르상티망인가? 아님 권력의지를 지향하고 있는가?

파이 세대라 일컫는 지금 20~30대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어디를 자극하느냐, 무엇이 발현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권력 대신 소비(자)로 용어를 대체해 보면 재밌는 사실들이 보일 것이다.)  


그럼, 이제 당신의 약점은 보이시나요?





르상티망으로 가득한 노예 도덕은 인간 본성인 권력의지에 반한다.

사전적 의미로 르상티망은 불안하고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패배주의적 분노라고도 하고, 아등바등한들 제자리걸음 하기도 벅찬 삶의 허무함에 대한 억압적인 각성을 뜻한다.

 

르상티망을 철학용어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바로 '니체'였다
약자는 현실에서 강자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상상으로나마 복수하려 하는데, 이때 품는 감정을 바로 '르상티망'이라 불렀다.  사실 '복수', '원한' 이라기보다는 '패자의 질투심'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강자는 자신을 선한 존재로 평가하고 약자를 악한 존재로 평가한다. 당연히 약자는 이러한 인식에 불만을 품고 강자를 증오하지만 힘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강자에게 맞서 관계를 역전시킬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약자는 자신을 선한 존재라고 믿기 시작한다. 강자에게 맞서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선량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복종하는 이유는 공손하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약자를 옹호하는 기독교 도덕이라고 믿는다.
니체는 이처럼 앞뒤가 뒤바뀐 도덕을 '노예 도덕'이라 부르며 비난했다.
노예 도덕은 르상티망으로 가득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니체는 이러한 르상티망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운명을 강인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상을 주장한 것이다.

(Pixabay 무료 이미지:발췌)


니체는 종교를 사제 집단의 권익과 약자들의 르상티망이 합작한 산물이라고 봤다. 사제 집단은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위해 도덕과 죄의식이라는 무기를 발명했으며, 약자들로 이루어진 대중은 강자들로 이루어진 귀족 계급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착함·겸허·순종·인내·용서 따위의 미덕을 궁리해냈다. 원수를 사랑하라느니,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해주라느니 하는 예수님 말씀은 다 약자의 강자에 대한 “증오와 복수”에서 나왔다. 니체는 민주주의·사회주의·민족주의·여성주의 등 평등에 근거한 온갖 근대 사상을 그리스도교 복음의 세속화된 형태로 본다. 유신론자든 무신론자든 같이 놀라야 할 것은 신의 죽음이 아니라, 그 선언이 사랑·동정·박애와 같은 이상마저 몰살했다는 점이다. 니체에게 그것들은 신과 함께 합장해야 할 노예의 도덕에 지나지 않았다 



 * EBS 인문학 특강 '니체, 죽은 시대를 말하다'를 인용하였습니다.

 * 다니엘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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