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의 두 얼굴, 헐크와 배너 박사
* 표지 사진은 마스크 두 얼굴(Pixabay 무료 이미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긴박한 상황에서 결정을 해야 할 때, 우리의 무의식에서 내리는 순간적 판단에 대한 책 <블링크 Blink>를 쓴 말콤 글래드웰은 처음 2초 동안의 판단이 때로는 몇 개월의 분석 자료보다 정확하고 강력하다고 이야기한다. 2005년 판매된 이 책은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당신에게도 블링크 하는 DNA가 있음을 인식하고 개발하라는 목소리는 우리 모두에게 '내 그럴 줄 알았지( I knew it)'의 결과 편향을 불러일으켰다.
직관의 경이로움은 대단하다. 그 경이로움을 말콤은 달콤하게 속삭인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투입하면 할수록 좋은 성과가 있으리라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작동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적인 판단이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언제 본능을 믿고, 언제 경계해야 하며, 첫인상과 순간 판단이 관리될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
탁월한 의사결정자들은 덜 중요한 98가지 요인을 직관적으로 차단하고 정말 중요한 두 가지 요인에 초점을 맞출 줄 안다. '얇게 조각내어 관찰하기(Thin Slicing)'라 불리는 과정이 그것이다.
‘얇게 조각내어 관찰하기’란 수많은 정보 중에서 일부분만을 파악하여 결론에 이르는 방법이다. 설명은 간단치 않지만, 원리는 사실 단순하다. 가지치기와 정수 추출이다. 판단을 흐리는 쓸데없는 가지들은 가차 없이 쳐내 버리고 핵심이 되는 요소들만 뽑아내 일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물과 상황에 대한 통찰이 가능해지고, 혜안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순간적 판단의 힘에 대해 이해하고, 오류를 경계하며, 이 무한한 본능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강화하여 활용한다면 우리의 생활은 엄청난 질적 상승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말콤 글래드웰이 이야기하는 순간적 판단, 즉 ‘통찰’의 힘이다.
‘순간적 판단’은 24시간 일어난다
‘통찰’까지는 아니어도 순간적인 판단은 사실 모든 이들이 늘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을 처음 만날 때나, 쇼핑을 할 때, 낯선 곳에 갔을 때, 심지어는 눈앞에서 트럭이 덮쳐오는 위험한 순간까지도 우리는 늘 무의식적으로 순간적인 판단을 내린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첫눈에 반하는 것,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 이 모두 무의식이 머릿속에 들어 있던 수많은 경험을 통해 순식간에 처리하여 내린 결론이다. 이 판단의 순간은 이 사람을 알기 위해 소비하는 몇 개월의 시간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이다.
이 사업은 크게 성공할 거라는 확신, 엄청난 데이터를 분석한 뒤에만 나오는 것인가? 아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이미 무의식에 자리 잡은 거대한 컴퓨터가 이 사업의 전망을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분석해놓고 있는 것이다.
말콤은 단숨에 결론까지 도약하는 뇌의 영역을 적응 무의식 영역이라고 하는데, 최근 심리학에서는 이 같은 의사결정 방식에 대한 연구를 중요한 분야로 여긴다. 이 적응 무의식은 프로이트가 묘사한 무의식, 즉 너무 큰 혼돈에 휩싸여 있어 의식적으로 사고하기 힘든, 욕망과 기억과 환상으로 가득한 음침한 영역과는 다르다. 적응 무의식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데 필요한 많은 데이터를 신속하고 조용하게 처리하는 일종의 거대한 컴퓨터라고 보면 된다. 인간이 오랫동안 종족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극소량의 정보를 토대로 매우 민첩하게 판단할 수 있는 별도의 의사 결정 장치를 발달시킨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이 부분은 인지신경과학자들의 주요 연구 부분이다)
직관의 일반화 그리고 위험성
2005년 4월, 한 뉴스가 세상 사람들을 술렁이게 했다. 바로 잘생긴 사람이 봉급과 승진기회 등 직장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유리할 것이라는 가설이 통계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의 한 애널리스트가 `리저널 이코노미스트' 4월호에 외모와 임금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보고서를 실었다.
결론은 어쨌거나 `키 크고 날씬하면서 잘생긴 얼굴이 직장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것. 보고서에 인용한 한 조사에 따르면 외모가 떨어지는 사람은 평범한 얼굴을 가진 사람에 비해 임금이 9% 적었고 반대로 출중한 외모를 가진 이는 평범한 사람보다 5% 많은 봉급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비만으로 분류된 여성은 평균 체중의 여성보다 17%나 임금이 적었다.
신장도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됐다. 한 조사에 따르면 16세 소년 때 키가 나중에 성인이 됐을 때의 수입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키가 1인치 클수록 보수도 2.6%씩 늘었다는 것이다. 청소년기 신장의 우위가 가져다준 자신감의 차이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는 경영인들의 키가 일반인보다 3인치가 더 크다는 언론인 말콤 글래드웰의 조사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당시 분석 결과 미국인 남성의 평균 신장이 5피트 9인치(175.3㎝)인 반면 최고경영자(CEO)의 3분의 1은 6피트 2인치(188㎝)였다.”
미국의 29대 대통령이었던 워렌 하딩의 예를 들어 순간적 판단의 오류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말콤 글래드웰은 우리가 드러내는 본능적 반응은 우리를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흥미와 정서, 감정과 경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워렌 하딩은 ‘대통령처럼’ 생긴 남자였다. 그를 처음 본 로비스트 해리 도허티는 키도 크고 잘생긴 워렌 하딩의 멋진 인상에 압도당한다. 인상에 압도당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통령처럼 생긴’ 그는 곧 상원위원이 되었고, 대통령 후보에 올랐으며, 정말로 미국 대통령이 된다. 워렌 하딩은 2년 뒤 돌연사했고,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힌다.
그를 지지한 미국 국민들이 범한 치명적인 실수는, 워렌 하딩의 출중한 외모에 압도당한 나머지 본래 모습을 직시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핵심적인 정보만을 얇게 조각내서 판단하는 순간 판단 능력은, 빠르지만 편견과 차별에 오염될 경우 치명적인 오류로 여러분을 이끌 수도 있다.
‘워렌 하딩의 오류’와 같이 특히 외모에 압도되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잘생긴 정치인이 선거에서 당선되거나, 아무리 보아도 평범한 사람이 임원이 되는 경우 등이다.
말콤 글래드웰은 첫인상과 첫 느낌으로 하는 순간적인 판단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설명하기 어렵고, 또 핵심을 놓친 채 잘못 해석하기도 쉽다.
(그러나 다니엘 카너먼과 게리 클라인은 이 결론을 거부한다.)
통찰 없이 전문지식만 사용하면 전문가도 실수가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미술상이 쿠로스 상이라고 추정되는 오래된 석상을 가지고 폴 게티 박물관을 찾아온다. 박물관은 14개월에 걸쳐 조사를 한 뒤,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박물관을 방문한 한 미술사학자가 석상을 보자마자 바로 ‘이 석상은 가짜’라고 말한다. 그리고 결국 그 석상은 모조품임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그는 왜 자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감지했을 뿐이다. 그와 똑같이 ‘직관적인 반발’을 느꼈던 다른 미술사학자도 그 석상을 보는 순간 ‘새것’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전문지식을 가르쳐주지만 통찰력까지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수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통해서 순간적으로 정보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을 때 나타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자료와 근거를 통해서 판단하라고 교육받지만, 실제로 판단을 내릴 때는 통찰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말콤은 진정한 전문가는 전문지식과 통찰을 겸비한 사람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정확한 순간 판단 능력, 즉 ‘통찰’은 뼈를 깎는 노력과 숙고와 고뇌의 산물이며 순간적 판단과 첫인상을 교육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직관을 잘 교육하고 관리할 수 있다면.
허버트 사이먼은 "상황에 신호가 숨어있다. 전문가는 이 신호를 이용해 기억에 저장 된 정보에 접근하고, 그 정보에서 답을 얻는다. 직관은 재인(再認은 어떤 대상을 과거에 보았거나 접촉했던 경험을 기억해 내는 인지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게리 클라인은 재인 기반 결정 모델(Recognition-Primed Decision)을 만들어 전문가의 결정 과정을 설명한다. 그는 소방관 지휘관의 화재 진압 결정 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지휘관이 가능한 방법을 두어 개로 좁힌 뒤에 분석한다는 가설을 세웠지만, 그 가설은 틀렸다고 판명한다. 지휘관들은 보통 한 가지 방법만 생각해내고 그게 전부였다. 10여 년간 실전 경험과 가상 경험을 하면서, 가능한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유형 목록을 축적했고, 필요할 때면 그 방법부터 검토했다. 그러면서 머릿속을 자극해 당시 상황에 그 방법이 효과가 있을지 판단했다. 고려하는 행동방식이 적절하다 싶으면 실천에 옮기고, 적절치 않으면 가능한 다음 대안을 떠올려 이 과정을 반복하는 식이다.
다네일 카너먼식으로 바꿔 설명하면 이렇다. 첫 단계에서 연상 기억이 저절로 작동해 임시 계획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시스템 1(직관)의 작동이다. 다음 단계는 그 계획이 효과가 있을지 의식적으로 점검한다. 시스템 2 (이성)가 작동한다.
직관은 두 얼굴을 가졌다. 그럼 어떤 환경일 때 직관을 믿을 수 있는가?
헐크가 아닌 배너 박사를 만나려면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주변 환경이 대단히 규칙적이어서 예측이 가능할 때
오랜 연습으로 그 규칙성을 익힐 수 있을 때
불규칙적인 환경일 때는 헐크를 만날 공산이 크다. 그리고 전문가로 그 규칙성을 잘 알고 있을 때 만 가능하다. 말콤과 달리 통찰력을 갖춘 전문가는 정보의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으로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배너 박사가 제한적인 전문가 이듯이.
일반적으로 전문가는 자기 업무에서는 전문성이 높지만 다른 업무에서는 초보적 수준에 머물 수 있다. 자신의 일부 업무에서는 직관력을 발휘하지만 어떤 상황 또는 어떤 업무에서는 직관에 배신당할지는 알 수 없다. 전문가의 과도한 확신은 전문가의 '전문능력의 한계'를 인지 못하는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충분한 실행 기회(경험)를 가졌고 그 퍼포먼스를 실행한 질과 속도가 다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생긴 직관은 여전히 믿을게 못된다.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 저서 <블링크>, 2005
* Simon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David G. Myers, <직관의 두 얼굴>, Yale Univ. 2002,56
* 다니엘 카너먼, <Thinking; Slow and Fast>을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