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35)
눈을 뜨니 날이 밝아 있었다. 제비꽃은 옆에서 자고 있었다. 몇 시지? 핸드폰을 집었다. 벌써 정오 가까이 되어 있었다. 맙소사, 이렇게 오래 잤어? 그리고 또 맙소사, 카톡이 와 있었네. 진 대표였다.
-류미 대리님, 내일 오실 수 있죠?
-12시쯤 오세요. 제주시 OO동 XX아파트 YY동 ###호예요
재빨리 눈을 돌려 제비꽃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핸드폰 설정에 들어가 카카오톡 메시지 미리 보기를 해제했다. 조심하자.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제비꽃을 비행기 태워 집으로 보내자.
그제서야 제비꽃이 눈을 떴다.
"류미 일찍 일어났네."
"아냐 나도 방금 일어났어."
"너무 피곤하다. 지지난주부터 계속 야근하니까 죽을 맛이네. 입사하고 제일 힘들었어."
"고생했네."
"응. 그래도 다음 주말에 류미랑 남해 여행 가니까 힘이 나. 그것만 기다리고 있어."
"응 나도."
너무 짧게 대답했나? 제비꽃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역시 민감하게 반응하는군. 그는 세심해서 자상하긴 하지만, 동시에 매우 예민하기도 했다.
"제비꽃, 오늘 어디 가고 싶어?"
"글쎄 나는 제주도 딱 한 번 와봐서 뭐가 있는지 몰라. 그때도 학회 때문에 온 거라 많이 못 다녔어."
"그럼 피곤하니까 올레길이나 오름보다는 편한 데 가자. 바다 보러 갈래? 맛집도 가고."
"그러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세화해변이었다. 수심이 깊지 않고 잔잔한 바다. 특히 여름에는 모래사장과 어우러진 청량한 경치가 멋졌다. 섬세한 그는 이곳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할 것이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세화해변으로 향했다. 시간이 벌써 한시가 넘어 있었다. 여행할 땐 아침 일찍 일어나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어제 새벽에 잠들었더니 오전 시간을 다 낭비해 버렸네.
택시에서 내려 미리 검색해 둔 맛집에 들어갔다. 수제버거가 일품이라는 버거스테이였다. 들어가니 작은 공간이 예쁜 소품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취향 저격일세.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버거 두 개와 양파튀김, 감자튀김, 맥파이 맥주 두 잔을 시켰다. 하루를 늦게 시작해 다소 쳐져 있던 기분이 탄수화물과 알코올이 주입되자 급상승했다.
제비꽃이 자기 버거를 잘라 내 접시에 놔주었다.
"고마워 제비꽃. 내 것도 가져가."
"아냐, 류미 먹고 남으면 가져갈게."
"나 다 먹을 수도 있는데?"
"괜찮아. 류미 다 먹어도 돼."
나는 버거를 조심조심 칼로 잘랐지만 역시 무너져 버렸다. 이번에도 실패. 재료를 잘게 썰어서 포크로 엮어서 먹기 시작했다.
"맛있다. 그치?"
고개를 들어 제비꽃을 보았다. 그의 접시는 이미 비어 있었다. 나 딱 한 입 먹었는데.
"응 맛있네. 맥주도 맛있고."
나는 내 버거를 반 잘라 그에게 주고, 접시에 남은 버거를 급히 먹었다. 제비꽃을 못 만나는 동안, 그리고 다른 남자랑 2주 내내 밥을 먹으면서 그의 음식 흡입 템포를 잊고 있었다. 그는 내게 천천히 먹으라고 말했지만, 다 먹고 앉아 있는 사람 앞에서는 자연히 서두르게 된다. 맥주까지 싹 다 마시고 가게를 나왔다.
우리는 바다 쪽으로 걸었다. 날씨가 좋아서 바다가 한층 더 에메랄드 빛으로 보였다. 우리는 해변가 카페에 들어갔다. 이름은 카페공작소. 세화해변이 보이는 뷰가 일품이었다. 제비꽃이 당근주스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쟁반에 들고 왔다. 내 앞에는 당근주스, 그의 앞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였다.
"여기 카페 재밌는 거 하더라. 1년 뒤 엽서라고, 엽서를 사서 쓰면 1년 후에 엽서에 남긴 주소로 보내준대."
"진짜? 특이하다. 이 카페가 유명한 이유가 있었네."
"류미, 우리 서로한테 엽서 써주기 할까? 1년 뒤에 받아보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1년 뒤? 아니 지금 우리가 당장 한달 후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1년 뒤에 엽서를 보낸다고? 지금 섣불리 엽서를 썼다가, 1년 후 (진 대표와)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을 수도 있)는데 제비꽃의 엽서가 들이닥치는 일은 원치 않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서 1년 뒤라니.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아냐, 난 별로."
"왜?"
"그냥 별로 안 땡기네."
"그래? 흠... 그래도 나중에 추억도 되고 좋을 것 같은데, 별로야?"
"응 별로야."
"그래 그럼."
제비꽃은 실망한 눈치였다. 이후 말없이 바다만 쳐다보며 아메리카노를 홀짝댔다. 에휴... 왜 이런 거 가지고 삐져. 난 평소 제비꽃의 이런 면이 답답했다. 별거 아닌 거에 잘 토라진다. 그것도 깊게 토라진다. 뚱-해가지고 한 마디도 안 할 땐 속이 뒤집힌다.
그런데 잠깐. 그러는 본인은? 그동안 연락도 잘 안 했잖아. 연락이 뜸해서 내가 얼마나 신경 쓰였는데. 손글씨로 엽서 쓰는 것보다 카톡 하나 하는 게 더 쉽지 않아? 지금 누가 누구한테 서운해해야 하는데? 생각해 보니 열받았다.
"제비꽃, 왜 이런 거 가지고 뚱해 있어? 서운한 건 오히려 나야. 나 제주도에서 혼자 외롭게 있을 거 알면서 왜 그렇게 연락이 뜸했어? 엽서 쓰는 것보다 카톡 하나 하는 게 훨씬 쉽지 않아? 왜 자기는 쉬운 것도 안 하면서 나한테는 어려운 거 시켜놓고 삐져?"
"말했잖아. 프로젝트 때문에 바빴다고. 연락할 시간이 없었어."
"아니,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고 숨은 쉬고 화장실은 가잖아. 변기에 앉아 핸드폰으로 유튜브는 잘만 볼 거면서 나한테 카톡 하나 못해?"
"류미야...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자주 연락 못한 건 미안해. 하지만 좀 이해해 줘."
"그리고 왜 점점 나한테 소홀해지는데? 여기도 애초에 올 거 아니었잖아. 원래 친구 만나려고 했었잖아. 우리가 3주 동안 못 볼게 뻔한데 친구랑 먼저 약속 잡은 거잖아!"
왜 이렇게 화가 나지?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문득, 오늘 제비꽃이랑 싸워서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맘먹은 게 기억났다. 하지만 이건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난 정말로 서운했다.
"내가 그거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 말로는 우리 류미, 류미 하지만, 사실 내 생각 그렇게 많이 하는 것도 아니잖아! 나 신경도 안 쓰잖아!"
'결혼하자고도 안 하잖아!'라는 말은 애써 삼켰다.
"류미야."
나는 벌떡 일어나 카페를 나왔다. 어딜 가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무작정 해변으로 걸었다. 모래가 햇볕을 받아 뜨거웠다. 최대한 바다 가까운 곳으로 다가가 주저앉았다.
분했다. 감정이 식어도 내가 먼저 식어야 하고, 헤어짐을 말해도 내가 말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잡은 손에 힘을 빼기 시작한 쪽은 내가 아니라 제비꽃이다. 처음에는 좋다고 그렇게 매달렸으면서, 점점 무심해지는 게 자존심 상하고 속상했다. 진 대표가 내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면 내 자존심은 박살났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내 뒤를 따라 달려 나와서, 팔을 잡고 돌려세워서, 꼭 안아주며 사과할 줄 알았던 제비꽃은… 오지 않았다. 눈이 달리지도 않은 뒤통수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았다. 대체 어디 있는 걸까? 카페에 그대로 있을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걷고 있을까? 혹시 숙소로 돌아간 건 아닐까? 고개를 돌려 어딨는지 찾아보고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노을이 질 때까지 그는 내게 오지 않았다. 밤새 그 자리에 있을 기세였던 나는, 오줌이 마려워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모래사장이어도 쌀 수는 없으니까. 사람이라는 미약한 존재여...
일어나서 뒤로 돌아 걸었다. 제비꽃이 10미터 뒤에 앉아 있었다. 계속 저기 있던 거야? 왜 와서 달래주지 않고 저러고 있어. 속에서 천불이 났다.
"가자 이제."
제비꽃이 말없이 일어섰다. 우리는 도로로 나가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숙소에 들어와서도 우린 멀찍이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침묵을 견딜 수 없을 때쯤 내가 말을 꺼냈다.
"어떻게 할 거야?"
"뭘?"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류미야..."
"지금까지 나 방치한 거 맞지? 인정해? 나한테 소홀한 것도 맞지?"
"아직도 그 얘기야? 제발 그만해... 류미 넌 날 숨 막히게 만들어."
"뭐? 내가?"
"어. 너는 항상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 내가 바빠서 연락 못했다고 하면 이해해 주면 안 돼? 나를 좀 믿어줘. 왜 나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없어... 내가 그렇게 믿음을 못 줬어?"
"아니 다 떠나서 무슨 소리냐고! 내가 숨 막히게 하고 벼랑 끝으로 몰고 간다구? 어이가 없네. 그래 좋아, 제비꽃 맘대로 숨 쉴 수 있게 내가 여기서 나가줄게!"
나는 숙소를 뛰쳐나왔다. 화가 났다. 서운하다고 말한 것뿐인데 그걸 안 받아주고 내가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다고 오히려 맞불을 놓다니. 그냥 달래주면 안 되나?
열불이 나서 정처 없이 걸었다. 인적이 드문 동네고, 가로등이 몇 개 없어서 어두침침했다. 하지만 분노에 찬 나는 무서울 게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지만 무턱대고 앞으로 앞으로 걸었다.
이번에도 제비꽃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