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34)
촤아아아-
삼겹살 두 줄이 철판 위에 올려졌다. 종업원이 송이버섯, 꽈리고추, 숙주나물을 고기 옆에 나란히 놓았다. 고기 익는 냄새가 화아 올라왔다. 철판 한가운데 멜젓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여기 한라산 주세요."
K선배는 고기가 채 익기도 전에 소주를 시켰다. K선배는 한결같았다. 빈속에 소주 원샷. 소주 러버 그녀에게 안주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나도 오늘은 빈속에 한잔 들이켜지 않고서는 안 될 것 같아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순간,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는 제비꽃이 보였다. 두근두근. 심장이 설레서 콩콩대겠는가? 아니다. 현상수배 범죄자가 고깃집 문 열고 들어오는 형사를 보았을 때처럼 쿵쾅댔다.
제비꽃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어색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제비꽃! 여기!"
제비꽃이 활짝 웃으며 걸어왔다. 그는 허리 부분이 짤막한 하얀 면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왼쪽 가슴팍에는 총천연색 빨강파랑 스파이더맨 로고가 있었다. 스파이더맨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스파이더맨 티셔츠까지 있을 줄이야. 그걸 여기까지 입고 올 줄이야.
"안녕하세요 제비꽃, 류미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저는 Y라고 해요."
"전 Y 회사 동료 K라고 해요. 듣던 대로 인물이 훤하시네요."
그런 말 한 적 없다.
"안녕하세요 Y님, K님. 제비꽃입니다. 우리 류미랑 잘 놀아주셔서 감사해요."
"류미야 뭐 알아서 잘 놀고 있었는데요. 하하."
"네? 그게 무슨…"
제비꽃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Y 저거저거! 나는 급히 그의 어깨를 눌러 의자에 앉혔다.
"자자 얼른 드시죠. 삼겹살이 맛있게 구워지고 있어요. 지금이 딱 먹을 타이밍이에요."
다행히 제비꽃은 불판 위에 노릇노릇 익고 있는 고기와 채소들에게 금세 마음을 빼앗겼다. 우리는 고기를 입에 넣고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제주도의 푸른밤을 시작했다. 막상 고깃집은 회색빛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지만.
그러고 보니 제비꽃을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자리가 처음이었다. 제비꽃과는 지금껏 그런 자리를 만들지 않았다. 낯 가리는 그가 분위기만 다운시킬 게 뻔했으니.
하지만 예상외로 그는 매우 활발했고, 말이 많았다. 농담도 던졌다. 그다지 재미가 없었는데도 Y와 K는 깔깔깔 웃어줬다. 신난 제비꽃이 더 큰 목소리로 대화를 주도했다. 어색한 순간이 간간이 있었지만, 착한 Y와 K는 제비꽃에게 장단을 맞춰줬다.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르고, 생각보다 즐거웠다.
K선배는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소주를 열 잔 째 원샷한 그녀가 가방을 뒤적이더니 뭔가를 손에 쥐었다. 담배와 라이터였다. 끊었다고 하더니 결국 저러네.
"나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 놀고들 있어요."
K선배가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화장실이 아닌 반대편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Y도 K선배를 따라 나갔다. Y는 다이어트, K선배는 금연을 걸고 내기했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내기는 Y의 승리로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Y도 고기 먹는 속도로 봐서는 쉽게 승리할 것 같진 않았다.
"제비꽃, 나 같이 나갔다 올게. 괜찮지?"
"응 괜찮아. 다녀와."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제비꽃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저 둘과 얘기를 나눠야 했다. 나가보니 예상대로 K선배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쭉 빨고 있었다. Y는 옆에서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선배, 담배 끊었다더니 왜 또 피워요."
"아 류미 씨, 오늘 기분이 너무 좋아서 안 피울 수가 없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삼겹살에 소주 마시는데 담배 생각이 안 날 수 있어? 나 그냥 짧게 살다 가더라도 계속 피울래."
"그래요 선배. 인생 뭐 있나. 근데 류미, 제비꽃 생각보다 괜찮은데? 착한 거 같애."
"그치? 착하긴 착해. 그럼 언니는 진 대표보다 제비꽃이 나아 보여?"
"무슨 소리야, 당연히 진 대표지. 실제로 보니까 좀 미안한데 그래도 난 진 대표 추천. 제비꽃은 눈 딱 감고 쳐내."
그때, K선배가 담벼락에 담배를 비벼 껐다. 담배꽁초를 주머니에 넣은 그녀는 담뱃갑에서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줄담배라니. 애초에 금연 결심을 한 것부터 그녀에겐 무리였다.
"류미 씨, 나는 제비꽃이 나은 거 같애."
"왜요?"
"류미 씨 눈엔 안 보여? 지금 엄청 노력하고 있잖아.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지? 제비꽃 MBTI가 뭐야?"
"INFJ라고 하더라고요."
"그럴 거 같았어. 나도 INFJ거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런 자리 힘들어. 제비꽃 지금 애써 농담하면서 어울리려고 노력하잖아. 저런 사람 흔치 않아. 무리해서 노력하는 이유는 그만큼 류미 씨가 좋다는 뜻이고."
"그래요? 나는 Y랑 K선배가 스스럼없게 대해주니까 편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냐. 제비꽃이 노력하는 게 난 보여. 그런 사람 버리면 안 돼. 류미 씨, 잘 생각해."
나는 혼란에 빠졌다. 사실 오랜만에 제비꽃 얼굴을 보니 좋았다. 그동안 연락이 뜸했어도, 이렇게 서프라이즈로 나타나니 서운했던 마음도 누그러져 있었다.
"류미 씨, 내일은 Y랑 둘이서 놀 테니까 제비꽃이랑 시간 보내. 그리고 잘 생각해 봐. 제비꽃이랑 진 대표 중 누굴 고를지. 근데 난 솔직히 진 대표 별로인거 같애."
"왜요?"
"그렇게 빼빼 말라비틀어져서 어따 써. 내 눈엔 별로 매력 없어. 그냥 제비꽃 해. 응?"
하아... MBTI 동족이라 편드는 건가, 아님 정말 제비꽃이 낫다고 생각하는 걸까. 진 대표처럼 키 크고 날씬하고 비율 좋은 피지컬을 빼빼 말라비틀어졌다고 표현하다니. 옛날 사람이라 그런가? 하지만 옛말 틀린 거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정말 노력한다는 장점이 흔치 않은 자질인 걸까?
셋이 자리로 돌아왔다. 제비꽃은 뭔가 알아차린 눈빛이었지만 아무 말도 안 했다. K가 짐을 주섬주섬 챙기며 말했다.
"제비꽃, 만나서 반가웠어요. 우리는 서울에서 퇴근하고 온 거라 무지 피곤하네요. 먼저 들어갈게요."
"벌써 가시게요?"
"벌써라뇨. 둘이 데이트해야 하는데 우리가 눈치 없이 낀 거죠. 주말에 날씨 좋다니까 둘이서 많이 돌아다녀요. 우린 우리대로 놀 거니까."
"아 네네. 오늘 만나 뵈어 반가웠습니다. 다음에 또 류미랑 같이 만나요."
"그래요. 다음에 만나요. 류미 씨 우리 간다."
"네 조심히 가세요."
둘은 사라지고 우리만 남았다. 철판 위에는 고기 몇 점과 말라비틀어진 버섯이 남아 있었다.
"술 더 마실래?"
제비꽃이 물었다.
"아니 그만 마실래. 근데 제비꽃, 오늘 원래 지방에서 올라오는 친구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근데 류미 보고 싶어서 취소하고 왔어. 우리 이렇게 오래 안 만난 적 없잖아."
잘 알고 계시네. 그런 인간이 애초에 3주를 안 볼 생각을 해?
"그렇지. 잘 왔어. 그럼 언제 올라가? 내일?"
"아니 일요일 저녁 비행기표 사놨어."
"뭐.. 뭐? 일요일 저녁?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일요일은 고양이 보러 가는 날인데... 우리 두준이... 아니 진 대표 집에.
"왜? 무슨 일 있어? 역시 내가 오면 안 됐나?"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으로 제비꽃이 말했다.
"아니 아니지. 아냐 아냐. 너무 좋아서 그래! 내가 얼마나 심심했는데. 잘 왔어. 진짜로."
일이 왜 이렇게 꼬이지. 일요일에는 진 대표네 가야 하는데. 고양이는 핑계고 우리가 남녀로 만날 수 있는지 확인하는 매우 매우 중요한 날인데.
머리로 여러 시나리오를 꾸며봤지만 딱히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이 가장 가능성 있게 다가왔다.
'좋아. 싸우자.'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토요일에 적당한 트집을 잡아 싸우고, '나는 우리 관계를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일단 서울, 아니 경기도로 돌아가 있어라. 잠시 떨어져 있자. 시간을 갖자' 이렇게 말하면 될 것 같았다. 괜히 시비 거는 게 찔리지만 어쩔 수 있나. 이렇게라도 빠져나와야지.
제비꽃을 데리고 숙소에 들어왔다. 아침에 방을 치워놨기에 망정이지, 속옷이랑 짐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어 창피할 뻔했다. 만난 지 8개월이 됐지만 우리가 모든 걸 공유한 사이는 아니니까.
제비꽃이 어정쩡한 자세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방에 둘만 있으니 어색했다. 고작 2주 지났는데 이렇게 낯설다니. 이건 그와 내가 영혼의 단짝이 아니라는 증거 아닐까? 만약 한 달을 떨어져 있으면서 연락 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와 나의 감정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사실 우리는 꼭 서로가 아니어도 상관없었을 사람들 아니었을까? 나는 딱 나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매던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수많은 여자 중 오로지 나를 픽했을 남자. 하지만 제비꽃은 내게 충실하게 잘해주긴 했지만, 반드시 '나'여야만 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여자친구니까 잘해준 것 같달까? 그의 착함과 성실함은 인정받아 마땅하지만, 운명의 짝을 원했던 내게 그런 면모는 늘 의구심으로 남아 있었다.
반대로 진두준 대표는, 협력사 직원에 나이는 6살이나 많은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까놓고 말해 우리는 이성적인 감정이 싹틀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사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는 그야말로 그가 그이고, 내가 나이기 때문에 생긴 감정이다. 옵션이 서로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수많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픽한 사이인 것이다.
다시 제비꽃으로 돌아와서. 어쩌면 외로웠던 우리는 연애의 맛에 취해, 서로가 진정한 짝꿍인지 검증하는 절차를 건너뛰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누군가가 필요했던 시기에 만나 서로의 외로움을 채워주는 정도의 존재를 운명이라 믿어버린 건 아닐까?
머리가 복잡했다. 불 끄고 침대에 나란히 누웠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제비꽃의 손이 스멀스멀 다가와 내 몸을 더듬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나도 모르게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어둠 속에서 제비꽃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당황하더니 곧 상처받은 눈빛이 떠올랐다. 미치겠네. 남의 속도 모르고. 하긴 이 속을 알면 절대 안 되지.
"미안해 제비꽃. 내가 어제 잠을 설쳐서 피곤하거든. 오늘 말고 내일 뜨밤 하자."
연애 초반에는 스킨십 안 한다고 집으로 유인하고 별 짓 다했는데, 이젠 나도 한풀 꺾여 있었다. 마음에 두 남자를 담는 건 무리인 것 같았다. 어느새 내 마음속에는 단 한 명의 존재만 남은 것 같았다.
아마도 그건 진두준 대표일 것이다.
***훗날 K선배는 내게 왜 제비꽃을 추천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다. 그녀는 만취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