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33)
목요일이었다. 이번 주도 내내 퇴근하고 진 대표와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바로 숙소에 데려다줘서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진 대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진두준 대표는
아침에 일어나 동네를 뛰거나 산책한다.
부산에서 태어나 2살 때 서울로 이사했다.
누나가 1명, 형이 1명 있다.
경제학과 통계학을 복수 전공했다. 학교는 인서울 중위권 대학이다.
좋아하는 영화감독은 폴 토마스 앤더슨.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쓰고 있다. 20살 넘어서부터는 3줄 이하로 쓸 때가 많지만,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마지막 연애는 3년 전이다.
고양이를 키운다.
"고양이요? 나 고양이 진짜 좋아하는데!"
고양이를 좋아하는 남자라니. 난 고양이를 좋아하는 남자를 좋아한다.
예전에 늦은 밤, 앞에서 걸어가던 남자가 길에 쭈그리고 앉았다. 뭐 하나 봤더니, 길가 수풀에 있는 길고양이와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하는 거다. 그는 한참 동안 앉아서 고양이와 교감했다. 난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다가 말을 걸어볼까 백번 고민했다. 용기가 없어 그냥 지나치면서, '저런 남자랑 사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사 오고 얼마 안 됐을 때 데려온 고양이예요. 퇴근하고 집에 오는데 계속 따라오더라구요. 아주 새끼는 아니고 한 4~5개월쯤 된 애였어요."
"좋은 일 하셨네요. 고양이 이름이 뭐예요?"
"공주요."
"공주요?"
"네 공주요. 여자 앤데 예쁘게 생겨서 공주라고 지었어요."
...그다지 창의력이 풍부한 편은 아니구나.
"고양이 궁금해요. 엄청 귀여울 것 같아요."
"아... 그럼 주말에 고양이 보러 오실래요?"
쿵쾅? 심장이 뛰었다. '고양이 보러 올래?'는 내가 제비꽃 유인할 때 썼던 수법 아닌가. 물론 진 대표네는 진짜 고양이가 있긴 하지만.
나는 덥썩 받았다.
"그럴까요? 금요일이랑 토요일은 친구들이 놀러 온다고 했고, 일요일은 괜찮을 것 같아요."
"좋아요. 일요일 점심때 오시면 되겠다."
숙소에 돌아와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웠다.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2주일을 시속 5cm로 다가오다가 급 200km로 돌진하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연하라 속도 전환이 능숙한가? 근데 이거 꼬시는 거 아니고 진짜 고양이만 보러 오라는 거 아냐? (예를 들어 집에 갔는데 사람은 없고 고양이만 있다거나...)
카톡이 울렸다. 내 연애 대모 Y였다.
-류미, 내일 K선배 반차 쓴대서 좀 일찍 도착할 것 같아.
-좋아. 사무실 근처에 있으면 퇴근하고 바로 갈게.
-ㅇㅋㅇㅋ
금요일부터 Y는 K선배와 제주도에서 휴가를 보낼 예정이었다. K는 Y의 전 회사 선배로, 나도 여러 번 같이 술 마시면서 친해졌다. K선배는 나보다 7살이 많지만, 워낙 천진난만한 성격이라 함께 놀면 재밌었다. K선배는 결혼 생각이 전혀 없고, 가볍게 연애만 하면서 살고 있었다.
어떤 면에선 K선배가 부러웠다. 나도 결혼에 미련이 없다면 저렇게 즐기고 살 텐데. 결혼을 염두에 두니 고민이 많고, 마음 가는 대로 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도 제비꽃은 연락이 없었다. 내가 또 먼저 연락을 해야 하나? 제주도에 오기 전에는 누가 먼저 연락하는지 신경 쓸 필요도 없었지만, 최근 제비꽃의 연락이 부쩍 줄어들었다. 난 그에게서 연락이 언제 오는지 의식하고 있었다.
우리 사이는 뭘까. 대놓고 싸운 것도 아니고 표면적으론 문제가 없었지만, 뭐랄까... 좀 찜찜했다. 폭풍전야가 이런 느낌일까? 어쩐지 이번 남해 여행이 제비꽃과의 관계에 분수령이 될 것 같았다.
다음 날, 평소와 다르게 사무실이 조용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휴가를 떠난 탓이었다. 한 시간만 있으면 퇴근이었다. 난 주말에 Y랑 K와 어디로 놀러 갈지 찾아보고 있었다.
카톡!
Y였다.
-류미, 우리 도착했어. 사무실 앞 카페에 있으니까 퇴근하고 내려와
-응 조금만 기다려
그때였다.
"류미 대리님, 일 다 끝나셨어요?"
뒤를 돌아봤다. 진 대표였다.
"네, 오늘 일은 마무리했어요."
"그럼 오늘은 일찍 가보세요. 친구분들 온신다고 하셨죠?"
"네 맞아요. 지금 요 앞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얼른 가보세요. 우린 일요일에 만나요."
"아 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사무실에서 나와 카페로 갔다.
"K선배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K선배를 마지막으로 본 지 1년이 넘었다.
"류미 씨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류미 씨는 왜 볼 때마다 얼굴이 어려져?"
"K선배도 똑같아요. 누가 40살 넘었다고 하겠어. 누가 봐도 30대 초반인데."
"그런가? 요새 담배를 끊어서 그런가 봐. 하하하. 근데 우리끼리만 젊어 보이지 남들이 보면 다 늙었다 그럴걸?“
사실이었다. K선배는 동안이긴 하지만 30대 초반으로 보이진 않았다. 나로 말하자면, 최근 눈꺼풀이 많이 쳐져 안검하수를 걱정하고 있었다. K선배도 이런 내가 어려 보인다고 생각했을 리가 없으므로, 다 립 서비스다. 그래도 젊어보인다는 칭찬을 주고받는 건 기분 좋다. 역설적으로 둘 다 늙어가고 있다는 걸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나도 커피를 시키려고 카운터에서 메뉴를 보고 있었다. 그때, 카페 문을 열고 익숙한 기다란 형체가 걸어 들어왔다. 진 대표였다.
"어 대표님?"
"류미 대리님, 친구분들 만나셨어요?"
"네 저기 있어요."
나는 Y와 K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힐끗 보았다. 둘은 우리를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제가 디저트 사드리려고 왔어요."
"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도 괜찮아요. 여기 얼그레이 타르트랑 소금빵 2개씩 주세요. 그리고 따뜻한 카페라떼도 한 잔 주세요."
"대표님도 커피 드시게요?"
"아니요. 류미 대리님 거예요. 대리님 따뜻한 카페라떼만 드시잖아요."
심장에 지진이 날 거 같았다. 아침마다 내가 커피 사오는 걸 본 모양이다.
"오늘 저녁은 뭐 드시러 가세요?"
"저희 삼겹살 먹으러 가요. 금요일이니까 고기랑 소주가 땡긴다고 해서. 주당들이에요. 호호."
"드실 줄 아는 분들이네요. 그런데 어떤 친구들이세요? 나이가 좀 달라 보여서요."
"일하다가 친해진 사이요. 제주도 파견 왔다니까 겸사겸사 놀러왔네요."
"그렇군요."
다시 돌아보니, 두 사람은 고개를 쭉 빼고 더더욱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 티 좀 내지 말라구.
진 대표가 주문한 얼그레이 타르트와 소금빵, 따뜻한 카페라떼가 나왔다. 진 대표가 쟁반을 들더니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저는 방해 안 할게요. 디저트 맛있게 드시고, 오늘이랑 내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대표님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진 대표가 나가고 나는 우리 테이블로 돌아왔다. 내가 앉기도 전에 Y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이 진 대표야? 얼굴 왜 저렇게 작아? 비율도 무슨 아이돌 같애."
"맞지?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K선배가 말했다.
"저 사람이랑 류미 씨 둘 다 눈에서 꿀 떨어지던데? 이 정도면 사귀는 사이 아니야?"
"정말 진 대표 눈에서도 꿀이 떨어졌어요?"
"어. 완전. 뚝뚝."
Y가 얼른 낚아챘다.
"잘해봐. 어디서 저런 비주얼을 만나. 난 부러울 따름이다. 내가 지금 남자친구 유지하는 것도 저런 사람이 주변에 없기 때문이지, 있었으면 당장 넘어갔어. 갈아타지 않은 건 단지 기회가 없어서였을 뿐이라고. 제비꽃은 빨리 정리해."
연애 대모 Y는 내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나는 2주 동안 거의 경계를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하면 나는 이미 진 대표와 함께였다. 그의 매력은 너무나 강력했다.
회사 대표라는 카리스마, 내면의 단단함,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겸손함, 나와 비슷한 취향 등등...을 들 수도 있지만, 까놓고 말해 난 그의 젊음과 외모에 끌렸다. 내 판타지는 남친과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이 '뭐야 저 여자 남자에 비해 겁나 늙어 보인다'라는 수군거림을 듣는 거다. 진 대표는 내 판타지를 마침내 실현시켜 줄 남자였다.
"근데 제비꽃한테 뭐라고 말해... 난 못해. 헤어지자고 하면 분명히 울텐데. 우는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Y가 얼그레이 타르트를 큼지막하게 잘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얼굴을 왜 봐. 카톡으로 해. 원래 이 세계는 잔인한 거야. 눈 딱 감고 실행해."
"에휴... 큰일이네."
"못하겠으면 어쩔 수 없지 뭐. 근데 저 사람 놓치면 평생 후회할걸?"
"에휴우우..."
옆에 둔 핸드폰이 울렸다. 제비꽃의 영상통화였다. 양반은 못 되네. 수락 버튼을 누르자 제비꽃의 인자한 둥근 얼굴이 푱 하고 나왔다.
"류미! 나 지금 어디게?"
"글쎄 어디야? 친구 만난다더니, 만났어?"
"이제 만나려고. 내 인생에서 가장 친한 친군데, 요새 연락이 뜸해서 직접 보러 왔지."
"어디로?"
"제주도로."
"뭐? 제주도? 친구를 보러 제주도에 왔다고?"
"응 내 인생에서 가장 친한 친구 류미를 보러 제주도에 왔지. 지금 제주공항이야."
맙소사... 제주도에 왔다고?
"지.. 진짜? 아니 말을 하고 왔어야지! 이렇게 갑자기 오는 게 어딨어!"
"왜 그래? 내가… 잘못했나? 나는 서프라이즈 해주고 싶어서 말 안한 건데. 혹시 이러면 안 되는 거였어?"
제비꽃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쉽게 실망하는 타입이라 여기서 잘못하면 끝도 없이 쳐진다.
"아냐 잘 왔어! 너무 놀라서 그랬어. 제비꽃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거짓말.
"근데 오늘이랑 내일 Y랑 K선배 놀러 와서 같이 다니기로 했는데, 같이 놀아도 괜찮아?"
"아 그렇구나. 괜찮아. 내가 방해 안 하고 조용히 옆에서 다닐게."
"그럼 일단... 우리 저녁에 삼겹살 먹기로 했거든? 식당 알려줄 테니까 올래? 공항에서 멀지 않으니까 택시 타고 와."
"응 알겠어. 그럼 조금 이따 봐."
통화를 끊자 Y가 말했다.
"드디어 제비꽃 보는 거야? 일이 흥미진진하게 돌아가네."
"언니들 진 대표 얘기는 절대 하면 안 돼요. 알겠지?"
"류미 씨, 우리 바보 아냐. 잘 커버 쳐줄 테니까 걱정 말고 가자."
"고마워요 K선배."
"고맙긴 뭘. 사랑은 선착순이 아냐. 더 마음이 가는 사람을 택하는 게 맞지. 우리가 잘 보고 의견 줄게.”
"그래 류미, 제비꽃이랑 술 한잔 같이 해보고 생각해 보자고."
우리는 카페를 나와 삼겹살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었다. 등줄기로 흐르는 땀이 더워서 나는 땀인지 식은땀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