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연애의 완전한 엔딩

편집증 시대의 연애(32)

by 류미

금요일이었다. 드디어 제주도에서 맞는 첫 주말이다. 아침부터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혹시 진 대표가 주말에 만나자고 하면 어쩌지?’


또 김칫국스럽긴 해도, 어제 그만큼 분위기가 좋았다. 수많은 경험으로 미뤄보아 그의 눈빛은 둘 중 하나다. 나한테 약간 반한 단계로 들어섰거나, 나한테 이미 푹 빠졌거나. 그러나 젊은 남자들이 접근하면 일단 경계해야 한다. 내가 순수하게 마음에 들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내가 가진 것 - 재산 등 - 을 노린 것일 수도 있으니. (재산이 없으니 다행이지)


어제 카페에 있을 때 제비꽃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때가 기점이었다.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아 남친이 있는 걸 알릴 수도 있고, 숨길 수도 있었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화장실에 가는 척 나와서 몰래 전화를 받은 것이다. 제비꽃한테는 잠에 취한 척 연기를 했다.


"어..어? 누구세요. 아 제비꽃. 지금 몇 시야? 나 씻지도 않고 잤네. 너무 졸려서 기절했어. 내일 통화할까."


일은 저질러졌다. 난 아슬아슬하게 어떤 경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갈 수도 있고,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는 경계였다. 이번 주말을 진 대표와 함께하게 되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류미 대리님, 즉석떡볶이 좋아하시는 거 맞죠?"


"네 좋아해요."


우리는 퇴근 후 즉석떡볶이를 먹으러 왔다. 사실 난 일반 떡볶이를 더 좋아한다. 즉석떡볶이는 처음에는 맛이 그럭저럭 괜찮지만, 시간이 지나면 떡과 사리가 푹 퍼져서 국물이 찐득찐득해진다. 난 늘 첫맛이 똑같이 유지되는 것을 선호한다. 첫맛이 유지되지 않을 거라면 새로운 걸 먹는 게 낫다.


"제가 즉떡을 진짜 좋아하거든요. 대학 때 여자 동기들이랑 떡볶이 먹으러 많이 다녔어요. 남자애들은 떡볶이 별로 안 좋아해서."


맞다. 떡볶이를 일부러 먹으러 다니는 남자는 거의 못 봤다. 떡볶이집에 가면 남자들은 거의 없고, 있어도 여자랑 함께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제는 잘 잤어요? 제가 늦게 보내드려서 피곤하신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저 원래 밤에 늦게 자요. 산책하고 오니까 오히려 더 푹 잔 것 같아요."


강하게 눈웃음치는 순간, 눈가의 주름이 너무 패여 보일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얼른 눈에 힘을 풀고 입 근육만 양옆으로 쭉 당겼다. 뭔가 광대 같은데.


"대리님, 이번 주말엔 뭐 하세요?"


왔구나. 심장이 철렁했다. 주말에 날 어디로 데려갈 셈일까? 월정리나 서귀포, 아니면 협재 쪽으로 데려가려나? 아니면... 우도? 우도는 배편이 일찍 끊기고 기상 상황이 나쁘면 배가 안 뜨기도 하는데 혹시 거기 들어갔다가…?


"아 별다른 계획이 없네요. 차도 렌트 안 해서 돌아다니기 쉽지 않을 것 같고. 숙소에만 있으면 심심할 거 같아요."


던졌다.


"아 안타깝네요. 저는 이번 주말에 세미나가 있어서 서울 가거든요."


튕겨나왔다.


"아... 서울 가세요?"


"네, 주말에 제가 제주에 있었으면 같이 맛집 탐방 갔을 텐데. 아쉽네요. 주말에 날씨 좋다고 하니까 택시라도 타고 돌아다니세요. 아깝잖아요."


"그래야겠네요. 많이 다닐게요."


김칫국 안 마시려고 입을 꾹 다물었는데, 이건 뭐 팔에 바늘 꽂고 강제 수혈되는 수준이네. 실망한 티를 조금도 내지 않으려고 환하게 웃으며 물통에 있는 물을 컵에 부었다. 물이 뿌얬다. 숭늉인가 보네. 숭늉 먹고 정신차리란 뜻이구나.


컵을 들고 마시는데 진 대표가 이상하게 쳐다봤다.


"괜찮으세요?"


"네? 뭐가요?"


"그거 육수예요 대리님."


풉.


그랬다. 숭늉이 아니라 육수였다.


"하하하 대리님, 어제도 느꼈지만 진짜 엉뚱해요. 대리님 이러는 거 사람들이 다 좋아하죠?"


"하하... 제가 실수를 좀 자주 해요. 원래 늙으면 이래요."


뻔하지만 민망할 땐 늙은이 드립이 짱이다. 진 대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말씀이에요. 대리님 어려 보이고요, 실제 나이도 그래요. 저는 8살 연상까지 사귀어봤는데요 뭐. 이 정도 나이 차는 친구죠."


심.쿵.


제비꽃은 연상연하 커플 얘기만 나오면 '남자들이 뭐가 아쉬워서 나이 많은 여자를 만나냐'고 말했는데, 이 젊고 아름다운 스타트업 대표는 6살 차이도 친구라고 말하고 있었다.


떡볶이를 다 먹고 진 대표 차에 탔다. 이제 그의 시뻘건 폭스바겐도 익숙해졌다.


"대리님, 다음 주엔 제가 맛집 더 많이 데려가드릴게요. 주말 잘 보내세요."


"네 서울 잘 다녀와요."


숙소에 돌아와서 가만히 생각해봤다. 진 대표가 나한테 관심이 조금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대놓고 들이대지 않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 친해졌다고 술 마시자 치근대지도 않고, 매너 좋게 숙소에 얌전히 데려다줬다. 우리에게 시간이 3주밖에 없었지만 그는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는 내가 좋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그저 친절이 조금 과한 사람일 수도 있다. 혹은 오랜만에 육지에서 온 사람이 반가워서 그럴지도 모르고,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재산 같은... 물론 난 없지만서도.


그리고 홍삼 사기 사건 이후로 애가 좀 맹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 회사의 대표인데 저런 허술한 사기에 걸려들다니? 본인은 한 번도 사기를 당해보지 않았다고 여러 번 강조했지만 글쎄. 누가 그 상황에서 '저 원래 사기 잘 당해요'라고 말을 하겠느냐고. 이건 오랫동안 함께 지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리고 그는 나이가 6살이나 어리므로, 혹시 나랑 사귄다 해도 금방 흥미가 식어서 다른 젊은 여자에게 가버리거나, 한 4년쯤 만나고 내 나이가 40이 됐을 때 본인은 결혼 생각 없다고 나를 영원한 싱글로 만들어버릴 가능성도 농후했다. 그리고 제비꽃을 배신하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직접 당해봐서 안다. 바람피우고 헤어지는 게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그러나 제비꽃은 만난 지 8개월이 되어가는데 결혼 얘기는 꺼내지도 않고 내게 점차 소홀해지고 있었다.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면 결혼할 수 있다고 누가 확신하는데? 혹시 제비꽃, 사회생활 때문에 억지로 여자 만나는 위장 게이 아냐?


"아 복잡해!!!"


위장 게이까지 생각이 닿자 이제 그만할 때라고 느꼈다. '그리고'와 '그러나'로 이어지는 네버엔딩 잡생각을 끊어보려 불 끄고 침대에 누웠다. 물론 그 후로 늦은 밤까지 내 창의적인 생각들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눈을 떠보니 이른 아침이었다. 아무 계획도 없는 제주에서의 첫 주말이 시작되었다. 오늘 뭘 해야 좋을까. 바다를 보러 갈까, 맛집을 갈까, 올레길을 걸어볼까. 그러나 난 알고 있었다. 내가 어디로 갈지.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향했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산일출봉에 도착했다. 주차된 중국인 관광버스들을 지나 성산일출봉에 올랐다. 30분이면 충분히 올라가는 코스였다.


두식이랑 이곳에 왔을 때 우리는 성산일출봉을 내려다보며 영험한 기운을 느꼈더랬다. 시간이 흘러서일까? 그때의 영험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추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남친을 몇 번을 갈아치우고 새로운 남자가 다가오는 마당에, 아직도 두식이는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성산일출봉에서 내려와 아무 식당에서 성게국을 먹었다. 원래 이곳에 오면 만나식당 갈치조림이 정석이지만, 혼자 웨이팅까지 해서 먹고 싶진 않았다. 어렸을 땐 혼밥도 맛있게 잘했는데 언젠가부터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혼자 먹으면 맛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제 매끼 함께 밥을 먹을 사람이 필요했다.


식당에서 나와 조금 내려오니 왼편에 카페가 보였다. 저 카페를 당연히 기억한다. 두식이랑 갔던 곳이니까. 카페에 들어갔다. 내부는 한산했다. 커피를 시켜서 테이블에 앉았다. 옆 선반에 방명록이 몇 권 꽂혀 있었다. 이 방명록 또한 당연히 기억한다. 우리는 이 공책에 서로에게 쓰는 편지를 남겼다. 5년이 지났는데 방명록이 그대로 있을 줄이야.


두근대며 방명록을 펼쳤다. 거의 초반에 우리가 쓴 글이 있었다. 오픈 초에 우리가 방문한 듯했다. 글에는 당시 우리가 암호처럼 주고받던 유머가 가득했다. 어쩜 이렇게 재기발랄하지? 20대 후반, 우리는 젊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잔뜩 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고 밝힌 건 아니지만, 이런 푸르른 나날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거라 확신하는 사람들이 쓸 법한 글이었다.


방명록을 열면서 눈물이 나면 어쩌지 싶었다. 하지만 글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너무 재밌어서 깔깔대고 웃었다. 이때 재밌었지. 얘도 나도 많이 어렸어. 유치한 말장난을 우린 비범한 유머라고 자부했지. 서로의 재치에 감탄하면서. 그땐 걔랑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었는데 말야. 마치 세상에 우리만 존재하는 것 같던 순간들. 아마 이런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다.


난 깨달았다. 이젠 두식이를 보내줄 시점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지금껏 그를 떠올리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증오가 아니었다. 그를 소환시켜 분노했던 이유는 내게 못할 짓을 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그 시절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식이는 내가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증명하는 존재였으니까. 그가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면 그 시절이 영원히 이어지고, 나는 이런 초라한 모습으로 나이 들지 않아도 될 것이었으니.


하지만 두식이가 있건 없건, 시간은 흐르고 빛나던 것들도 바래기 마련이다. 힘껏 웃으면 눈가에 깊이 패이는 눈주름 또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건 내가 쇠락해서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삶을 매 순간 맞이하고 있는 것뿐이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때 그 시절을 놓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왕년 운운하는 할매들처럼.


두식이와 나는 인연이 되어 행복한 한때를 보냈고, 그것이 다하여 각자의 길을 간 것뿐이다. 용서할 필요도, 미워할 필요도 없었다. 비록 끝은 처참했지만, 과거 우리는 - 적어도 나는 - 행복했고, 더없이 충만했던 시기가 내 삶에 있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으니까.


이제야 누군가를 진짜 사랑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제비꽃이든 진 대표든, 혹은 그 누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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