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31)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업무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일이 조금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리님, 저녁 드시러 가시죠?"
진 대표와 매일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있었다. 첫날엔 예의상 저녁식사를 함께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매일 저녁 나를 식당으로 데려갔다. 식사하고는 차로 숙소까지 바래다줬다. 이 정도면 '혹시 나한테 관심 있나' 생각이 드는 것도 인지상정.
물론 내가 훨씬 늙고 절세 미인도 아닌데, 망상이라는 걸 안다. 게다가 밥만 같이 먹지 진 대표는 날 숙소에 데려다주고 회사로 즉시 돌아갔다. 그렇지만 남녀 사이에 자주 보다 보면 무슨 일이 싹틀 수도 있는 법 아닌가?
(바라고 있다는 뜻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아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와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메뉴는 국밥이었다. 갈칫국을 한 번도 안 먹어봤다고 하니 진대표가 데려온 곳이다.
"여기 갈칫국 정말 잘 해요. 믿고 한번 드셔보세요."
진 대표의 말대로였다. 갈치를 넣고 끓인 국인데 비린내가 하나도 안 났다. 듬뿍 들어간 알배추 덕에 국물이 끝내주게 시원했다.
"진짜 맛있어요. 대표님 덕에 맨날 맛있는 거 먹네요. 근데 저녁에도 일 많으신 것 같은데, 매일 이렇게 나오셔도 돼요?"
'왜 매일 저녁 나랑 밥 먹어? 나한테 관심 있어?'라고 물을 수 없으니 슬쩍 떠보았다.
"바빠도 밥은 먹어야죠. 저녁때 맛있는 걸 먹어야 야근할 힘도 나요."
"보통 몇 시까지 일하세요?"
"그때그때 다른데, 12시까지는 늘 있는 것 같아요."
"12시요? 와, 우리 사장님은 매일 6시도 안 돼서 퇴근하는데."
"그게 좋은 리더죠. 저는 아직 능력이 부족해서 시간을 때려 넣고 있는 거예요."
"에이 겸손하시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창업했는데 능력이 부족한 게 말이 돼요?"
"투자받아서 근근이 연명하는 신센데요 뭐. 언젠간 좋은 날 오겠죠."
진 대표는 언젠간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믿는지, 자신 있게 웃어 보였다.
우리는 밥을 다 먹고 일어섰다. 요 며칠 밥값을 진 대표가 다 내서 오늘은 내가 내려고 했다.
"오늘은 제가 계산할게요."
내가 먼저 계산대로 갔다. 진 대표가 급히 따라왔다.
"아니에요. 제가 사야죠. 제가 계산하는 게 맞아요."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꼭 사고 싶어요."
우리는 각자 카드를 꺼내 들고 옥신각신했다. 계산대 앞에 있던 아주머니가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진 대표의 손에서 카드를 빼들며 말했다.
"으이구 이런 건 남자가 내는 거여. 남자가 사준다고 하면 여자는 잠자코 얻어먹는겨. 아주 훤칠하니 잘 생겼는데 밥까지 사주고 얼마나 좋아."
아 아니... 아줌마. 우리 그런 남녀 사이 아니거든요. 진 대표를 힐끗 보았다. 그가 웃고 있었다. 웃음의 의미는 뭐지?
나는 진 대표의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목요일이 되니 좀 피곤했다. 제비꽃은 하루종일 연락이 없었다.
-제비꽃, 퇴근했어?
-아니 아직 회사야
-류미는 일 끝났어?
-응 이제 숙소
-야근하느라 많이 힘들겠네
-아냐 안 힘들어
-오늘까지만 하면 마무리되니까 괜찮아
-저녁은 먹었어?
-응 먹고 들어왔어
-갈칫국 먹어봤는데 엄청 맛있더라
-갈칫국? 나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
-누구랑 먹었어?
헛. 갑자기 곤란한 질문. 남자랑 단 둘이 먹었다고 하면 제비꽃이 서운해할지 모른다. 회사 대표이긴 하지만, 제비꽃한텐 남자냐 여자냐가 더 중요할 테니.
-누구랑 먹긴 혼자 먹었지
-내가 여기서 같이 먹을 사람이 어딨어
-그렇구나
-우리 남해 여행 가서 같이 맛있는 거 많이 먹자
-그래
결국 제주도는 안 올 생각이구나, 이 인간. 서운했지만 냅두기로 했다. 이런 얘기는 만나서 해야지 통화로 하면 싸움으로 번진다.
-이따 집에 가면서 전화할게
-응 수고
씻고 침대에 누웠다. TV를 틀어놓고 핸드폰 하면서 뒹굴거렸다. 차를 렌트할 걸 그랬나. 평일에 퇴근하고 숙소에만 있으니 좀 아쉬웠다.
그때, 카톡 알림이 떴다.
- 류미 대리님, 뭐하세요?
진 대표였다. 뭐지?
- 대표님~ 저 그냥 숙소에 있어요
- 바쁘세요?
- 아뇨 전혀요
뭐지뭐지? 뭔데?
-저랑 바다 보러 가실래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얘, 진짜 나한테 관심 있나?
하지만 섣불리 김칫국 마시는 거, 가장 경계해야 할 짓이다. 상대는 6살이나 어린 젊은이인 데다 회사 대표 아닌가. 아무 의미 없는 접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가 정말 심심하거나, 내가 불쌍해 보여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엄마처럼 보여서 효도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시간은 여덟 시 반. 아직 늦지 않은 밤이었다. 가야 할까? 머릿속에 어렴풋이 제비꽃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외간 남자랑 바람 피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바다를 함께 보러 가는 것'뿐이다. 거절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거절하면 그야말로 김칫국을 들이켰다는 뜻일 게다. 게다가 제주에 도착하고 4일 동안 아무 데도 못 가봐서 답답했다.
- 오 좋아요
- 그럼 제가 30분 내로 숙소 앞으로 갈게요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TV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화장대에 앉아 얼굴에 파우더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진 대표한테 예뻐 보이려는 게 아니고, 해변에서 셀카라도 찍게 되면 민낯이 너무 번들거리게 나와서 제주의 추억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려는 아무 사심 없는 행동일뿐더러, 나는 남친이 있는 몸으로서 절대 다른 남자에게 잘 보이려는 의도가 1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얼굴에 파우더를 바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얘기하고 싶지만, 말할 사람도 없으니 혼자 떳떳하게 얼굴에 뭔가 약간 발라도 괜찮잖아?'
제비꽃의 잔상이 머리에 희미하게 떠오르려 했지만, 나는 퍼프를 얼굴에 세게 탁탁탁 두드리며 그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나는 사심 없이 나가는 것이니 떳떳하다. 뭘 찍어 바르곤 있지만.
30분이 지나고, 그로부터 10분이 더 지났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진 대표 성격에 못 오게 되면 연락을 해줄 텐데, 조금 이상했다.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카톡이 울렸다.
- 대리님, 내려오실래요?
곧바로 내려갔다. 진 대표가 밖에 나와 있었다.
"대표님, 늦으시길래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어요. 별일 없는 거죠?"
"대리님... 저 사기당한 것 같아요."
진 대표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무슨 일이에요?"
"저 너무 바보 같아요."
"왜 그래요? 뭔데요."
"일단 타세요. 가면서 얘기해요."
나는 그의 차에 탔다.
"아까 대리님 숙소 근처에 도착했거든요. 그런데 다마스에서 어떤 아저씨가 내리더니 창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창문을 내렸죠. 무슨 일이시냐고."
"근데요?"
"담배 피우냐고 묻더라구요. 안 피운다고 했더니, 갑자기 홍삼 좋아하냐고 묻는 거예요. 홍삼 안 먹어봤다고 하니까, 자기가 홍삼 영업사원인데 이번에 납품업체에서 주문 수량을 잘못 얘기하는 바람에 50박스가 남았대요. 그거 다 버리게 생겨서, 이것도 인연인데 10박스를 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담뱃값만 받고."
"그래서요 받았어요?"
"네 일단 너무 안돼 보여서 10박스 받아서 트렁크에 넣고, 같이 편의점에 갔죠. 담배 사러요. 카운터에서 담배 10보루를 달라고 하더라구요. 저는 담배를 안 피워서 한 보루에 얼만지도 몰랐어요."
"1보루면 담배 10갑인가요?"
"모르겠어요. 아저씨가 담배를 받더니 고맙다고 하면서, 자기 급한 일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나가더라고요. 계산을 하려고 보니... 가격이 40만원이 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사기당했구나."
"헐... 돈 내지 말지 그랬어요."
"금액 보자마자 뛰어 나갔는데 벌써 차 끌고 가버렸더라고요. 상황이 복잡해질 것 같아서... 그냥 결제하고 나왔어요."
"진짜요? 아니 별 미친 XX를 다 보겠네."
황당해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입을 틀어막으며 진 대표를 쳐다봤으나 그는 경황이 없어 못 들은 것 같았다.
"담배를 한 번이라도 피워봤으면 이런 사기는 안 당했을 텐데... 담배 안 피우는 게 이렇게 돌아올 줄 몰랐네요."
"신고 안 해도 되겠어요?"
"못 찾을 것 같아요. 차에 돌아와서 검색해 보니까 유명한 사기 수법이더라구요. 거의 못 잡는대요. 제가 바보죠 뭐. 괜찮아요."
"속상해서 어떡해요."
"에이 괜찮아요. 액땜했다고 생각할래요. 대리님이랑 밤바다 보러 가니까 그걸로 됐어요."
어머? 40만원 날려도 나랑 바다 보러 가면 해결되는 거야? 이러면 안 되는데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20분쯤 달려 바다에 도착했다. 열 시가 다 된 시각이었지만 해변에 사람이 많았다. 진 대표와 나는 바다 가까이 걸어갔다. 나란히 걸으면서 서로 손등이 스쳤다.
"가끔 머리가 복잡하고 힘들면 여기 오거든요. 일하면서 많이 외로운데, 바다가 있어서 버틸 만해요."
진 대표는 창업하기 전까지 제주도에 한 번도 와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그가 여러 사정 때문에 제주에서 사업을 하고 살게 되어 많이 외로웠다고 말했다. 제주는 풍경도 멋지고 매력적인 곳이지만, 섬이기에 갇힌 기분을 매일 느낀다면서.
반대로 나는 제주도에 여행만 10번 가까이 왔다. 제주는 내게 해방의 공간, 설렘의 땅, 그리고 실패한 사랑의 기억이 여운처럼 남은 곳이었다. 만약 내가 제주에 살게 되면, 제주는 내게 어떤 공간이 될까.
"대리님, 좀 쌀쌀하죠? 우리 차 마시러 가요."
해변에서 나와 카페에 들어갔다.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따뜻한 조명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바다 쪽으로 통유리가 나 있어 해변이 내려다 보였다.
우리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마주 보는 게 아니라 유리창을 보고 나란히 앉았다. 나는 약간 불편했다. 흔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여름 밤, 제주 밤바다, 창문 너머 해변이 보이는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업체 대표와 거래처 직원.
만약 이 구도가 평범한 30대 중반 여자와 20대 후반 남자가 된다면, 이야기는 훨씬 쉽고 재밌게 흘러갈 것이다. 제주도 어딘가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 제주에서 옛사랑과의 아픈 기억을 품은 여자와, 친구도 가족도 없이 일만 하며 살던 남자가 밤바다에서 서로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면서, 3주 동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과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결국...
아, 나 남친 있지.
바람은 내 사전에 없다. 절대 안 된다. 두식이가 나한테 했던 짓을 내가 똑같이 해서는 안 된다. 머릿속에서는 벌써 진 대표와 많은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서둘러 덮어버렸다. 그냥 우리는 심심해서 함께 밤바다를 보러 나왔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창문으로 해변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옆에 앉은 진 대표가 그윽한 눈길로 내 얼굴을 빤히 뜯어보고 있다는 것을.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건 사랑에 빠지기 직전, 혹은 그 순간에 남자들에게서 보았던 눈빛이었다.
그리고 내 청바지 뒷주머니에서는 핸드폰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