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30)
“류미 씨, 출장 준비 다 됐지?"
"네 과장님. 완벽하게 했죠."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바로바로 연락하고. 잘 다녀와요."
6월 마지막 주, 제주도 출장이 잡혔다. 거래처 시스템 작업으로 3주간 가는 파견 근무였다. 입사하고 첫 파견지가 제주도라니. 설레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사실, 정말 설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출장 직후 제비꽃과 휴가를 맞춰 남해로 여행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무려 4박 5일의 여정. 이거슨 뭐 거의 신혼여행이지 ㅎ
하지만 제주도에 공짜 숙소가 나오는데, 이 또한 그냥 넘어가긴 섭했다. 난 신나서 룰루랄라 계획을 세웠다. 출장 직전 주말에 함께 제주도에서 1박 2일을 함께 보내고, 다음 주말에도 오라고 해야지. 그다음에는 남해로 떠나는 거다!
저녁이 되자 여느 때처럼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제비꽃의 얼굴이 화면에 뜨자마자 다다다다 쏟아냈다.
"제비꽃, 나 제주도 출장 가면 주말에 올 거지? 성수기 제주도는 비싸서 갈 엄두도 못 냈는데, 회사에서 숙소 해주니 개이득. 나 출장 전 주말에 내려가려구. 그때 같이 가면 어때? 그 다음 주말에도 오구."
"첫 주말은 어렵겠는데. 그때 아버지 칠순이라 다 같이 강릉 여행 가기로 했어."
"아.. 그래? 그럼 그다음 주말은? 괜찮지?"
"응 괜찮을 거야. 잠깐만. 아, 이때..."
"이때 뭐? 무슨 일 있어?"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뭔데? 말해."
"그때 지방에서 친구가 올라온대서 만나기로 했거든. 근데 괜찮아. 취소하지 뭐."
기분이 상했다. 내가 출장 가는 틈을 타 약속을 풀로 채우셨구만? 첫 주말은 가족 여행이라 그렇다 쳐도, 그 다음 주말까지 약속을 잡을 줄이야. 난 당연히 주말마다 나를 보러 올 거라 생각했다.
"됐어. 친구 만나. 지방에서 올라오는데 취소하면 미안하잖아. 원래 스케줄대로 해."
"화났어? 아냐, 친구 안 만나도 돼. 류미 보러 제주도 갈게. 기분 풀어."
"화 안 났다니까? 왜 괜찮다는데 취소한다고 해? 그냥 친구 만나."
"으이구. 그래 그때 봐서 하자."
네? 그때 봐서 하자? 아니, 내가 기분이 상해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때 봐서 하자가 무슨 소리야. 무조건 취소한다고 했어야지.
최근 들어 제비꽃에게 변화가 느껴졌다. 우리가 만난 지 8개월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초반에 뭐든 다 해주고 나한테 맞춰주더니, 이제 자기 삶을 챙기기 시작했다.
처음 사귈 땐 제비꽃이 결혼을 보챌까 우려했다. 하지만 웬걸. 8개월이 되어가는데도 그는 결혼의 ㄱ자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너무 들이대는 것도 싫지만, 아무 말 없는 것도 좀 불안했다. 그는 어떤 생각일까? 혹시 결혼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나를 간 보는 중? 아니면 자금이 딸려서? 모르겠다. 나중에 남해 여행 가서 마음을 떠봐야지.
월요일 새벽, 지하철에서 내려 김포공항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원래 토요일에 가려 했지만, 제비꽃도 없는데 굳이 일찍 갈 필요가 없었다. 문득 두식이랑의 제주도 여행이 떠올랐다. 그날 비행기 시간이 빠듯해서 김포공항 역 무빙워크를 둘이 전속력으로 뛰었다. 내가 앞에, 두식이는 뒤에서 뛰었다. 훗날 두식이는 내가 뛰는 뒷모습이 너무 귀여웠다고 두고두고 말했다. 우리의 끝은 처절했지만, 그전까지의 기억은 더없이 달콤했지.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제주도에 여러 번 와본 바, 제주 여행의 핵심은 날씨다. 날씨가 좋아야 여행이 몇 배로 즐겁다. 아, 나 여행 아니고 출장 온 거지.
택시를 타고 거래처 건물 앞에 내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깔끔한 사무실이 나왔다. 파티션이 있는 책상이 아니라 큰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고, 직원들이 노트북으로 일하고 있었다. 요새 스타트업들은 지정 좌석 없이 일한다더니 여기도 그런가 보네. 아저씨들만 드글드글한 회사에 다니다가 여기 오니 뇌가 후레쉬해지는 것 같았다.
누구를 찾아야 하나 두리번거렸다. 그때 저 앞에서 키가 큰 젊은 애가, 아니 젊은 직원분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검은 티셔츠와 통 넓은 청바지 차림에 목에는 출입증이 걸려 있었다.
"혹시 류미 대리님?"
"네 맞는데요."
"안녕하세요.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죠. 저는 이 회사 대표예요. 진두준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오실까요? 자리 세팅해 뒀습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자리로 걸어갔다. 이렇게 젊은 사람이 대표라고? 놀라웠다.
사실 정말 놀라운 건 그의 주먹만 한 얼굴과 기린같이 긴 다리였다. 최근 홍대에서도 느낀 건데, 요새 젊은이들은 종자가 달라진 거 같다. 저 진두준 대표처럼 팔다리가 길고 작은 머리를 가진 젊은이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조선 토종 종자로 저런 피지컬이 가능하다니, 확실히 대한민국은 발전하고 있다.
80년대에 태어난 내 동년배들은 거의 다 얼굴이 크고 팔 다리도 길지 않다. 물론 제비꽃도... 말해 뭐 하나. 나도 조금만 늦게 태어날걸. 한 5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저런 피지컬들과 자연스레 연애하고 어울릴 수 있었을 텐데.
"이 책상에 앉으시면 돼요. 더 필요하신 것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그가 사무적으로 웃어 보이고는, 긴 팔다리를 휘저으며 저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컴퓨터 화면을 보는 척하며 눈동자를 굴려 그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그가 캐비닛에서 노트북을 꺼내 테이블에 앉았다. 여긴 사장실이 따로 없구나.
진 대표가 노트북을 켜고 자판을 타다다닥 두드렸다. 음... 참으로 작은 얼굴이도다. 아이돌이네 아이돌이야. 창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까무잡잡한 얼굴이 톤업되어 보였다. 피부도 어쩜 저렇게 좋지. 젊고 잘생겼는데 회사도 세우고 아주 팔방미인일세.
업무를 하다 보니 하루가 금세 갔다. 업무도 술술 풀렸겠다, 첫날을 자축하며 맛있는 걸 먹어볼까? 그때, 뒤에서 누가 불렀다.
"류미 대리님."
진두준 대표였다.
"업무 마치셨죠?"
"네."
"혹시 저녁에 약속 있으신가요?"
약속이 있을 리가 없잖아. 출장 온 건데.
"아뇨. 없어요."
"그럼 같이 저녁 드시러 가실래요?"
오, 파견 직원을 대표가 직접 챙기네.
"좋죠!"
나는 진도준... 아니 진두준 대표를 따라나섰다. 5분쯤 걸어 허름한 생선구이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아저씨들이 우글우글했다. 역시 로컬이랑 동행해야 찐 맛집을 갈 수 있다. 우리는 갈치구이 정식 2인분을 시켰다.
"일해보시니 어떠세요? 저희 담당자가 협조 잘하던가요?"
"네 친절하게 대해주셨어요. 작업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차근차근 일정에 맞춰서 해드릴게요."
"네, 대리님. 잘 부탁드릴게요."
갈치구이가 나왔다. 군침이 싹 돌았다.
"대표님,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너무 젊으셔서요."
"몇 살로 보이세요?"
진 대표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사무실에서 봤던 딱딱한 태도가 아니었다. 사석이라 조금 풀어진 걸까?
"글쎄요 창업하신 걸 보면 그렇게 어리진 않을 것 같은데... 얼굴만 보면 29살로 보여요."
"정확해요."
"헉?? 어머."
앳된 얼굴에 딱 맞는 나이였다.
"회사 생긴 지 3년 됐다고 들었는데, 대학 졸업하기 전에 창업하신 거예요?"
"네, 대학교 창업동아리 동기 2명이랑 같이 시작했어요. 제가 지분이 아주 조금 많아서 대표를 맡았는데, 3명이서 공동 운영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대단하시네요. 나이도 젊은데 엄청 진취적이신 거 같아요."
진 대표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흠, 누구 닮은 거 같은데 누구더라... 눈이 작고 웃을 때 완전히 실눈이 되는 저 얼굴...
"실례지만 류미 대리님 나이도 물어봐도 될까요?"
"저요? 맞춰보세요."
"음... 스물여덟 살?"
"풉. 장난치면 못써요. 그 정도면 놀리는 거예요."
"아니에요. 얼굴이 딱 그렇게 보이세요."
"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저 호랑이띠예요."
"호랑이띠요? 그럼 몇 살이에요?"
늙은이들은 나이를 물으면 띠로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본인이 40대에 가깝거나 넘었다는 사실을 바로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닌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쨌든 난 그렇다.
"모르시는구나. 나중에 검색해 봐요. 호랑이띠가 몇 살인지."
회사 대표라 그런지 처음 대화하는데도 어색하지 않게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대표가 괜히 대표가 아니구나.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달까?
갈치구이를 맛있게 다 먹고 일어났다.
"대리님, 제가 차로 모셔다 드릴게요."
"아니에요. 카카오택시 부르면 돼요. 금방 가요."
"이 시간엔 카카오택시가 잘 안 와요. 제가 회사에서 차 가지고 올 테니까 여기 잠시만 앉아 계세요."
대답하기도 전에 진 대표가 빠른 걸음으로 회사 쪽으로 사라졌다. 얼마 후, 저쪽에서 차가 나타났다. 새빨간 뉴비틀이었다. 너무 촌스러워서 웃겼다. 제주도 놀러 온 관광객인가 봐. 저런 차를 관광객 아니면 누가 타겠어.
그런데 차가 속도를 낮추더니 내 앞에 끼익 하고 섰다. 조수석 창이 내려갔다.
"대리님, 타세요!"
진 대표였다. 아니... 진 대표 차였어? 진중함과 소탈한 매력을 동시에 갖춘 창업자인 줄 알았는데, 뭐 이런 유치한 차를 타고 다니지? 조수석 문을 열면서 보니, 뒷좌석 문에는 싼티 나는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차가 아주 멋져요."
차 얻어 타는 사람은 무조건 차 칭찬을 해줘야 한다. 속마음이 어떻건.
"그쵸? 제 보물 1호예요. 주소 불러주시겠어요?"
그날 밤 나는 새빨간 뉴비틀을 타고 편하게 숙소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