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29)
우린 말 없이 걸었다. 드디어 문을 연 술집이 나왔다.
<오늘, 와인한잔>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시간은 오후 4시. 자리를 잡고 와인 2잔을 시켰다.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그는 내 시선을 피해 벽을 보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뭘 어떻게 해."
"헤어질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아까 그렇게 난리 쳤잖아. 이 정도면 헤어지자는 뜻 아냐?"
내 입장에선 그의 폭력성 - 위협적이지 않더라도 - 을 발견했고, 그의 입장에선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 터였다. 그 정도의 분노와 고함 데시벨이면 당연히 우리 관계는 끝이었다.
"헤어지는 거랑 상관 없어."
"상관없다니. 나한테 그렇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는데? 원래 여자친구랑 싸울 때 이래?"
"나 여자친구랑 싸워본 적 없고, 소리 지른 것도 처음이야."
"그럼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그가 내 눈을 바라봤다.
"보통은 남자친구를 그렇게 의심하지 않아. 범죄자라고 하지도 않고."
"말했잖아. 짚고 넘어갈 문제를 분명히 했던 것뿐이야."
"류미야, 이번만이었으면 내가 화 안 내고 사과할 수 있었어."
제비꽃이 와인을 원샷했다.
"류미는 꼬투리를 잡으면 끝까지 파고들잖아. 그땐 눈빛이 달라져. 그러고선 끝까지 나를 쥐 잡듯이 잡아.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내가 뭐가 무서워.“
"난 무서워. 그 눈빛을 보면 긴장돼서 얼어버려. 그 상태에서 어떻게 해명을 해."
기분이 나빴다. 나는 공정하고 원칙이 있는 사람이다. 딱, 의심가는 것만 짚어서 지적하고 추궁할 뿐이다. 근데 뭐? 쓸데없이 사람을 의심하고 쥐 잡듯이 잡는다니, 거 말이 좀 그렇네. 물론 지금껏 의심한 것들이 모두 빗나가긴 했지만, 나도 할 말이 있다.
"말했잖아. 그건 내가..."
"알아. 예전에 남자한테 배신당해서 트라우마가 있다고. 그런데 난 그 쓰레기랑 비교당하는 것도 불쾌해."
헤어진 지 5년이 넘은 두식이가 여전히 내 인생에 재를 뿌리고 있었다.
"지금껏 늘 테스트당하는 기분이었어.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용납을 안 하잖아."
그가 새로 나온 와인을 꿀꺽꿀꺽 마셨다.
“류미 넌 남자 보는 조건이 없다고 했지만, 내가 봤을 땐 그 누구보다 많아. 그 바늘구멍을 내가 통과할 수 있을까? 하다못해 꼬추 크기까지 검사하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
"풉."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평소에도 말만 나오면 웃긴 단어가 있다. 똥, 방구, 똥꾸멍, 꼬ㅊ... 이런 것들. 이 상황에 굳이 그 단어를 말해야겠어? '그거' 혹은 '거시기' 같은 대체어도 많은데.
"왜 웃어? 꼬추라는 말이 웃겨?"
"아니 그게 아니라.. 크흐흐흐 흠흠 아냐. 잠시 다른 생각했어. 계속해."
"...어쨌든 아까 소리 질러서 미안해. 그리고 여자 사진 보고 이러쿵저러쿵한 것도 잘못했어. 앞으론 누가 그런 거 보내도 대꾸 안 할게. 나... 류미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아까는 너무 비참해서 화가 났어. 평소에는 화를 잘 참는데, 가끔 이렇게 욱할 때가 있어."
또 하나의 적색경보가 켜졌다. 화가 '안 나는' 사람이어야지, 화를 '참는' 사람이어선 안 된다.
"혹시 여자 때린 적 있어?"
"없어. 만약 내가 류미 때리는 날에는 뛰어내려서 죽을게. 그러니까 걱정 마."
"겁 많아서 못 죽는다며."
"제발 이렇게 따져 묻지 말아줘... 나 힘들어."
아 이런 게 힘들다는 거구나.
"그만큼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야. 한 번도 그런 일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건 알 수 있었다. 그는 화를 냈지만 위협적이진 않았다. 뭐랄까... 굳이 말하자면 자신을 파괴하는 쪽 같았다. 그는 자신의 밑바닥을 보인 것뿐이었다. 극도로 찌질하고 감추고 싶었던 면을.
"난 류미를 정말로 아껴. 아까 길에서도 류미 얼굴에 햇볕이 정면으로 비추길래 계속 신경이 쓰였어. 그래서 자리 바꾸자고 한 거야. 근데 왜 안 바꿨어?"
길에서 나는 도로를 등지고 있었고, 제비꽃은 도로 쪽을 보고 있었다. 중간중간 그가 내 팔을 잡아 자리를 바꾸려 했지만 내가 뿌리치며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싸우다가 도로로 뛰어들까 봐 그랬지. 갑자기 뒤돌아서 차로에 뛰어들면 어떡해."
"그렇게 걱정이 많아서 어떻게 살래."
제비꽃이 나를 아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의 예쁜 마음은 이전 남친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종류의 것이었다. 그동안 아무리 의심의 눈초리로 샅샅이 쑤셔봐도, 그에게는 선의뿐이었다. 만약 내가 촉을 민감하게 세우는 대신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잘 어울리는 커플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보통의 여자가 아니다. 나는 30대 중반의 철벽녀, 곧 의심과 불안으로 똘똘 뭉친 편집증 4기 환자다. 나의 철저한 검증에 힘입어 그의 인간적인 단점이 드디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단점들이 야기할 수 있는 위험성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자기연민, 자신감 결여, 내면의 화, 그리고 와인을 연거푸 마시는 알콜중독의 가능성까지. 과연 장기적으로 이런 것들이 위험으로 작용하지 않겠는가? 자기연민이 우울증으로 발전하거나, 자신감 결여가 퇴사로 이어져 백수로 살며 내게 빌붙거나, 욱하는 성질에 나를 때리진 않더라도 집기를 부순다거나,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 바람을 피운다거나. 그리고... 그리고...그리고...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작은 가능성까지 가늠하자면 100가지도 넘을 텐데, 언제 다 리스트업 하지?
문득, 우리 테이블을 보았다. 빈 잔이 6개 있었다. 그것도 아까 마신 잔은 가져가서 그렇지 둘이서 10잔 넘게 마신 것 같았다. 낮술이라 그런지 취기가 확 올라왔다.
고개를 들어 제비꽃을 보았다. 그의 머리 뒤로 매장 풍경이 보였다. 출입문을 활짝 열어놔서 산뜻한 바람이 들어오고,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낮술이었기에 우리가 술 마실 수 있는 황금 같은 토요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와인은 1잔에 2900원부터였다.
기분이 믿을 수 없이 잔잔해졌다. 묘하게 후련하기도 했다. 따뜻한 오후에 성질도 냈겠다, 시원하게 울었겠다, 와인 마시면서 속을 터놓았겠다… 오늘은 이대로 괜찮지 않을까? 싸움에 헤어짐까지, 너무 많은 일을 하루에 다 겪을 필요는 없잖아?
”아 몰라. 됐어 다 필요 없고, 술이나 더 마시자. 오늘 일은 일단 끝. 저기요! 여기 와인 한 잔 더 주세요!"
나는 와인을 한 잔 더 주문했다.
——
다음날 아침, 눈을 떴는데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와인집에서 나와 2차로 호프집 간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 이후 기억이 없다.
핸드폰을 보니 제비꽃이 보낸 음성파일이 있었다.
'뭐지?'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내 목소리였다. 기억에 없는 대화였다.
(음성녹음)
"제비꽃~ 그거 알아? 다른 여자들이 남친한테 어떻게 하는지? 막 가방 사달라고 졸라요. 그럼 남자들이 막 3백만원씩 써서 에르메스 백 사주고 그래. (에르메스 가격이 3백만원의 10배쯤 되는 건 한참 후에 알았다) 근데 있잖아? 나는 아냐. 난 그런 여자가 아냐. 난 가방 필요 없고 돈도 필요 없어. 내가 벌면 되니깐~ 내가 말야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제비꽃 호강시켜 줄게~ 집에서 평생 피아노만 치게 해 줄게~ 나만 믿어. 그러니까... 의기소침해서 쭈그리고 다니지 말란 말야! 어깨 펴고! 어??"
(메시지)
- 제비꽃: 류미, 이 음성파일 클라우드에 저장해놨어. 나중에 기대할게. 나 꼭 집에서 피아노만 치면서 살게 해줘
기절하는 줄 알았다. 술 취해서 미쳤었구나. 술을 끊든지 해야지 정말.
그런데 아무리 만취했어도 말야, 망언도 급이 있지. 왜 이런 망언을 했지 내가?
'나 혹시… 이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