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예감할 때(2)

편집증 시대의 연애(28)

by 류미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을 뿐인데, 사람이 몰라보게 초췌해 보였다.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내 시선을 피했다.


"짐 줘."


짐을 달라고? 이대로 가버리려고?


"싫어."


"빨리 줘."


그의 짐은 그래봐야 가방이랑 쇼핑백 하나였다. 주는 거야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일단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제비꽃의 얼굴에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꼭 삶의 끝을 앞둔 사람처럼. 아니, 이미 삶이 끝나버린 사람처럼. 이제 그의 본모습을 확인했으니 헤어져도 아쉽지 않았다. 제비꽃보다 훨씬 괜찮은 남자들도 이보다 더 마이너한 이유로 헤어지곤 했다. 그와도 간단히 정리하면 끝이었다.


지금껏 쌓아온 정? 글쎄. 나는 나 자신을 지키는 게 훨씬 중요했다. 내겐 평생 함께할 '무해한' 파트너가 필요했으므로, 그는 오늘부로 아웃이었다.


"빨리 짐 줘. 집에 갈 거야."


"아니, 못 줘."


그에게 짐을 줄 수 없었다. 주면 그는 바로 이 자리를 뜰 것이다. 그전에 그의 마음을 알아야 했다. 억울한 건지, 나를 한 대 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자신을 경멸해서 죽고 싶은 건지.


사실 앞에 두 개는 상관없다. 오직 마지막의 가능성을 원천봉쇄 해야 했다. 그가 집에 가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 내 인생까지 망해버린다. 죄책감에 사무쳐서 내 남은 인생을 망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제비꽃한테 왜 그렇게 말했는 줄 알아?"


"몰라. 이제 그만해."


"우리 오늘 헤어져도 상관없어. 근데 난 이 말은 꼭 해야겠어. 남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여자 얼굴 평가하는 게 난 정말 싫어. 굉장히 실례되는 일이야. 난 내 남자친구가 그러지 않았으면 했어. 하지만 범죄자 취급한 건 미안해. 나쁜 의도가 없었다는 것도 알아. 그리고 그 친구가 먼저 시작했고 제비꽃은 거의 맞장구만 친 것도 알아. 하지만 그것 또한 범죄 가담 행위야."


아차차. 또 도발하는 말을 했네.


"...어쨌든 범죄까지는 아닌 건 맞아. 그렇게 몰고 간 건 미안해. 그렇다고 해도, 사람 많은 데서 나한테 소리 지른 건 잘한 일이야?"


역시 나는 달래는 데는 소질이 없다. 그의 기분을 풀어서 나쁜 생각 하지 않게 만드는 게 목적인데, 계속 잘못을 조목조목 짚고 있었다.


"그만하자 류미야."


"뭘 그만해. 나는 오늘 우리 관계가 끝나도 상관없다니까. 하지만 제비꽃이 이런 기분으로 집에 가지 않았으면 해. 기분 풀고 가."


"이미 엉망이 됐는데 어떻게 해."


"내가 진짜 범죄자로 생각한 게 아니라면 좀 낫지 않아? 그리고 그렇게 몰아간 것도 미안하다고 말했잖아."


"아무 의미 없어. 됐어."


분노하던 그는 온데간데없고, 기운 없이 축 쳐진 아저씨가 있었다. 소개팅 날 횡단보도에 서 있던 그 모습이었다.


"어떻게 하면 기분이 나아질 건데."


"류미가 왜 그걸 신경 써. 내 기분이야 어떻든."


"왜냐하면 그건..."


"그건 뭐?"


'니가 가다가 나쁜 생각 할까 봐 그렇지'라고 말은 못했다.


"암튼, 기분 풀어."


"됐어. 빨리 짐이나 줘. 집에 안 갈 테니까 이리 줘. 무거워."


"안 돼. 기분 풀 때까지 못 줘."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거 들고 있지 마. 무겁잖아.”


"안 돼. 이거 주면 가버릴 거잖아. 그런 기분으로 집에 가다가 나쁜 생각 할까 봐 그래."


"무슨 나쁜 생각."


"어디에서 뛰어내린다거나... 한강에 빠져 죽는다거나 뭐 그런..."


그때까지 눈도 안 마주치던 제비꽃이 고개를 들었다.


"나 겁 많아서 그런 거 못해. 빨리 주기나 해. 가방."


아참 겁이 많지. 겁 많은 게 이럴 땐 좋네.


"쇼핑백은 가지고 가방만 줘."


"쇼핑백은 뭔데?"


"선물이야."


그러고 보면 제비꽃은 만날 때마다 작은 선물을 가져왔다. 장미꽃 한 송이, 피지오겔 로션, 지갑, 핸드폰 케이스, etc... 크거나 비싼 선물은 아니지만 유용하거나 귀여운 것들이었다. 쇼핑백 안에는 민트색 죠르디와 노랑색 라이언 수건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어디서 받아왔어?"


"샀지. 류미 주려고."


카카오 캐릭터 수건을 돈 주고 사는 사람이 있구나. 우리집은 엄마가 송월타올 대리점에서 얻어온 수건을 썼다. 그런 수건엔 보통 '김갑순 여사 고희 기념' '100살까지 가즈아 최팔봉 선생' 이런 문구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처음엔 왜 저런 걸 가져오나 싶었지만, 이젠 신상 수건이 생기면 어떤 이름의 할머니/할아버지가 몇 살 생일을 맞았는지 정보를 입수하는 재미가 있었다. 어떤 이름이 오래 사는가 하는, 나름의 빅데이터 수집이랄까.


"고..고마워."


"어피치 수건도 있는데, 그건 내가 쓰려고 빼놨어. 쓸 때마다 류미 생각하려고."


수건이 담겨 있는 쇼핑백은 낡아서 손잡이 부분이 조금 해져 있었다. 좀 깔끔한 쇼핑백(파리바게뜨, 본죽 등)이나 브랜드 쇼핑백(나이키나 뉴발란스 같은)에 담아 오지. 정말 꾸밀 줄 모르는 사람이구나. 이런 후줄근한 쇼핑백에 선물을 담아 온 게 너무 꾸밈없고 순수해 보였다. 이 수건을 담으면서 설레며 웃음 지었을 제비꽃이 떠올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확실히 내 핀트는 좀 이상한 편이다)


"고마워. 잘 쓸게."


"고맙긴. 이제 아무 의미도 없는데."


"제비꽃, 저기 앉아서 잠깐만 얘기하자."


그의 손을 끌고 벤치에 데려가 앉혔다. 한참 가만히 있던 그가 손을 들어 이마를 짚더니, 점점 숨을 거칠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설마? 제발 그것만은... 제발...'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큰소리를 냈다.


"엉~~~ 엉엉!! 허어어엉!!!"


그랬다. 그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어깨가 위아래로 들썩이고, 눈물이 손목을 타고 떨어졌다.


“흐엉~ 헝! 엉엉엉…엉엉엉!”


나는 당황했다. 남자가 우는 건 많이 봤지만, 보통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더랬다. 이렇게 큰소리로 엉엉 우는 남자는 초등학교 이후 처음 보았다. 게다가 남자 어른이 이러는 건 드라마에서만 봤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봤다. 한 아저씨는 멈춰 서서 빤히 지켜봤다. 나는 눈길을 피했다. 아저씨, 좀 가요. 뭘 구경났다고 쯧.


"우...울지마. 그만. 그만 울어."


그가 허리를 굽혀 얼굴을 무릎에 대고 양 팔꿈치로 머리를 감쌌다. 그 자세로 더 크게 울었다. 어깨도 그에 맞춰 더 크게 들썩였다. 하... 이걸 어쩌나.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러다 등을 작게 토닥였다.


시간이 흘러, 그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가 양손으로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이제 다 울었어?"


"..."


고개를 든 그는 한쪽 손으로 턱을 바친 자세로 먼 곳을 바라봤다.


"왜 운 거야? 우리가 헤어지는 게 슬퍼서?"


"아니."


"의심받은 게 억울해서?"


"아니."


"죽어버리고 싶어서?"


"나 겁 많아서 못 죽는다고 했잖아."


맞다. 그랬지.


"내가 겁이 많아서 그렇지, 겁 없었으면 옛날에 죽었을 거야."


이런 tmi는 알고 싶지 않았다. 누가 본인 삶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가? 특히 나처럼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나 류미는 오래 살고 싶어서 오래 살고 싶다는 말도 아끼는 편이다. 혹시 부정 탈까 봐.


"그럼 뭐야?"


"내 인생이 불쌍해서 울었다 왜."


"에휴..."


저저 자기 연민 저걸 어쩐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그때 내 손 잡고 함께 뛰자고 그렇게 응원하고 북돋아줬는데 또 이러네. 대체 이 사람의 자존감은 어디서부터 세워줘야 할까? 아니, 내가 이 사람의 자존감에 뭔가를 할 수나 있을까?


토요일 오후, 예술의전당 건너편 벤치에 앉아 있는 그와 나. 온통 멋지게 차려입고 나온 사람들 속에 그는 홀로 후줄근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는 데이트할 때 깔끔하게는 하고 나오지만 귀티랑은 거리가 멀었고, 뭘 해도 약간 후줄근했다. 안에는 노랑색과 민트색의 알록달록 예쁜 색 수건이 담겨 있으면서, 겉은 해져 있는 이 쇼핑백처럼.


슬퍼졌다. 왜 나는 이 사람이 슬프지? 그의 눈은 어딘가 늘 슬퍼 보였다. 어쩌면 간절한 눈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동정이 아니야.’ 내가 늘 하던 말이다. 자신감 있고 멋지고 자상한 사람을 만나 보란 듯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내 앞에서 울고 있는 남자가 있다. 오늘 그는 내게 밑바닥을 보여준 상태다. 아니, 그 밑에 또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나는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오늘 겪은 일도 있으니 핑계 삼아 깨끗이 정리해 버릴까? 아니면 일단 한번 눈감아주고 이 관계를 이어나갈까?


나는 시간을 두고 조금만 생각해보기로 했다.


"우리, 술 마시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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