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27)
화창한 토요일 점심. 데이트하기 좋은 날씨였다. 더 이상 바람도 차갑지 않았다. 이제 겨울도 끝날 기미가 보였다.
따뜻해진 날씨만큼 그동안 변화가 있었다. 드디어, 내가 취업에 성공했다. 짜잔. 새 회사에 한 달 넘게 출근하고 있다. 사람들도 좋고 일도 잘 맞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번 회사는 오래 다녀서 뼈를 묻어야지.
제비꽃과의 사이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무엇이냐면...
"제비꽃, 올라오느라 힘들었지? 오구오구 고생했어.”
"아니, 안 힘들어. 류미는 일주일 새 더 예뻐졌네."
"내 미모야 매일 갱신 중이지."
우리는 말을 놓았다. (고작?)
젊었을 때야 사귄 당일에 말을 놓곤 했지만, 제비꽃 아저씨랑은 그러지 않았다. 물론 그의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워낙 조심성 많고 예의 바른 성격이라 말을 잘 못놓았기 때문이다.
"우리 오늘은 두부요리 먹으러 가자. 예술의전당 맞은편에 두부 맛집이 있대."
"좋지."
이젠 맛집도 척척 알아온다. 연애하면서 많이 발전했구만. 우리는 음식점에 들어가 뚝배기 순두부와 들깨 순두부를 시켰다. 날이 많이 풀렸지만 난 얼큰한 국물요리라면 사족을 못 썼다.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
"응 다녀와."
제비꽃이 자리를 뜨자마자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 김수민 님이 메세지를 보냈습니다.
김수민? 모르는 이름인데, 여자일까 남자일까? 내 지인 중 수민은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어떤 수민인데 토요일에 우리 제비꽃한테 카톡을 보내나? 혹시 여잔가?
불안해졌다. 바람 피운 전 남친 두식이는 나랑 죽고 못 살 때도 여자들이랑 연락하고 있었다. 물론 제비꽃이 그럴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 두식이도 내가 알기론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매불망 오직류미'를 외치던 그도 뒤에서 여자들이랑 질펀하게 놀아나지 않았던가? 인생에 그런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하다. 한 번도 겪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내 인생이 전체적으로 한 톤 어두워진 건 다 그 때문이다.
핸드폰은 판도라의 상자다. 열지 않는 것이 좋지만, 언젠가 열 거라면 일찍 여는 게 낫다. 두식이 때처럼 오랫동안 농락당하지 않으려면.
나는 화장실 쪽을 쳐다보면서 그의 핸드폰을 당겨왔다. 두근두근. 비밀번호는 알고 있었다. 내 생일이다. 잠금해제를 하고 카톡을 켰다. 읽지 않은 메세지가 3개 있었다. 안 읽은 대화창을 열면 분명 티가 날 텐데… 에라 모르겠다. 일단 열고 보자. 떨리는 손가락으로 대화창을 눌렀다.
<안 읽은 메세지>
- 김수민: ㅠㅠ슬프다 결혼을 왜 일찍 해가지고
- 김수민: 너는 결혼하지 마
- 김수민: 아니면 늦게 하거나
휴 친구구나. 친한 친구 같은데 왜 몰랐지? 나는 화면을 올려 보았다.
- 김수민: 아~~ 죽기 전에 아이유랑 한 번만 사겨보고 싶다
- 제비꽃: 니가 차은우면 가능할 텐데
- 제비꽃: 그리고 넌 이미 끝났어 유부남아
- 제비꽃: 정신차려라
뭐야... 이런 얘기하고 있었어? 나이 든 유부남이 어딜 아이유를 입에 올려. 짜증나게. 나는 화면을 더 올렸다. 오늘 대화 처음에 여자 사진이 있었다.
- 김수민: 사진
- 김수민: 누군지 알아? 송아영이야
- 김수민: 살 엄청뺀듯ㅋㅋ 성형도 한거 같은데 장난 아니지
- 제비꽃: 오 많이 예뻐졌네
- 제비꽃: 길 가다 마주쳐도 몰라보겠다
- 김수민: 누구 닮은거 같기도 하고...
- 김수민: 조이현 닮지 않았냐?
- 제비꽃: 어 닮았다
- 제비꽃: 근데 살 빼니까 날카롭게 생겼네
- 제비꽃: 내 스타일은 아냐
뭐? 스타일? 눈을 비비고 보았다.
그랬다. 스. 타. 일.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바로 제비꽃에게 선호하는 '여자 스타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조이현은 누구야? 송혜교나 전지현도 아니고 누구야? 핸드폰을 꺼내 조이현을 검색했다. 어리고 예쁜 배우가 나왔다. 티비도 안 보는 양반이 어떻게 신상 여배우를 알고 있지?
나는 이제껏 제비꽃을 딱히 남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아니, 남자긴 남자지. 여자는 아니니까. 하지만 여자를 보는 취향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다. 늘 내가 제일 예쁘다고 하면서 속세 여자들한텐 관심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으니.
그런데 내 앞에선 순진한 척하는 양반이, 뒤에선 욕정 가득한 얼굴로 인터넷에서 여배우들 검색하고 유튜브로 여자 아이돌 직캠을 본다? 열불이 났다. (욕정이 가득했는지와 여돌 직캠은 밝혀진 바 없으나,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가정 하에)
옛날 회사의 아가리 F4가 떠올랐다. 그렇게 여자들 얼평하고 연예인 순위 매기고 그랬는데, 제비꽃도 똑같은 남자였어? 게다가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 여성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한 거, 이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저쪽에서 제비꽃이 손을 비비며 다가왔다. 화장실 갔다 오면 반드시 손을 닦는 청결한 분~ 아니지. 그는 음흉한 사람이다. 이걸 어떻게 처분하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나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제비꽃이 내 표정을 살폈다.
“류미, 무슨 일 있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아냐.”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내가 “아냐”라고 하면 사실 뭔가가 있다는 걸 제비꽃은 잘 알고 있다.
“아니라니까.”
나는 묵묵히 순두부만 먹었다. 머릿속에는 '이걸 어떻게 질책해야 하나' 생각뿐이었다. 내가 기분이 안 좋은 걸 눈치챈 그도 말이 없어졌다. 둘 다 조용히 밥을 다 먹었다.
"제비꽃, 우리 전시회는 커피 마시고 보러 가자."
"그래."
우리는 음식점에서 나와 근처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토요일이었지만 시간이 일러 사람이 많지 않았다.
"류미, 여기 있어. 내가 커피 사 올게. 따뜻한 라떼 맞지? 톨 사이즈."
"응. 고마워."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어떻게 교묘하게 틀어서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알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결국 정공법으로 갈 수밖에 없단 걸. 그것이~ 나의 스.타.일 이니까. (끄덕)
제비꽃이 아메리카노와 카페라떼를 쟁반에 올려서 왔다. 그가 앉아서 커피를 배분했다. 내 앞엔 카페라떼, 그의 앞엔 아메리카노.
"제비꽃, 있잖아. 나 할 말 있어."
"그런 거 같았어. 뭔데?"
제비꽃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아까... 휴.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리 제비꽃이어도 '니 핸드폰 훔쳐봤다'라고 하면 화가 날 텐데. 어쩌지? 막상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괜찮아. 말해."
"있잖아. 아까 화장실 갔을 때 우연히 핸드폰을 봤어. 카톡이 왔길래 무심코 본 거야. 물론 일부러 본 건 아니고 어쩌다 보게 되었어. 그런데... 김수민이라는 사람이랑 대화 나눈 걸 봤어."
"근데?"
"김수민 씨가 여자 사진을 캡처해서 보여주고 둘이서 그 사람 얼평했잖아. 그럼 안 되는 거야. 알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
"만약 누가 제비꽃 사진 캡쳐해서 자기들끼리 못생겼네 어쩌구 하면 기분이 좋겠어?"
"어차피 그 사람이 아는 것도 아니고… 그게 절대 하면 안 될 일이야?"
나는 짜증이 났다.
"시작은 그렇겠지. 그러다 나중엔 일반인 여자 사진을 불특정 다수에게 뿌리는 걸로 발전할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그건 범죄야. 알아?"
"나 그런 거 안해."
"뭘 안해. 지금 안 해도 나중엔 할 수도 있다니까?"
"안 한다고. 그만해."
"뭘 그만해. 그건 범죄야, 범죄. 제비꽃은 범죄자가 되는 거야. 알아?"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범죄라고, 범죄'. 그가 얼굴을 감싸 쥐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래, 그럼 경찰에 신고해!"
그가 소리를 질렀다. 뭐야 왜 일어서. 그리고 목소리는 왜 이렇게 커져. 나는 조금 당황했다.
"어...어 그래. 신고할 거야. 둘이 또 그러면 신고할 거야."
"그래 신고해! 신고하라고!"
그가 씩씩대며 소리쳤다.
"넌 내가 우습게 보이니? 어??"
그는 이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무…무슨 소리야?”
"너 내가 잘해주니까 호구로 보이니? 어??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 거야! 내가 우습니? 어???"
거기서 갑자기 호구가 왜 나와. 카톡으로 여자 얼평하는 얘기 하는데 웬 호구?
그는 멈추지 않았다.
"너, 할 말이 있고 해선 안 될 말이 있는 거야!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이면 이러니? 어??"
성량이 어찌나 큰지, 스타벅스가 쩌렁쩌렁 울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직원들도 커피를 만들다 말고 우릴 쳐다봤다. 제비꽃과는 물론이고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난 당황해서 허둥댔다. 내가 한 말이 그렇게 잘못된 건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목소리 낮춰. 지금 뭐 하는 거야? 자리에 앉아."
내가 앉은 채로 그를 노려봤다. 여기서 기죽으면 안 된다. 지면 안 돼. 제비꽃이 씩씩대다가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잠깐 나갔다 올게."
그가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밖으로 휙 나갔다. 뭐야, 어딜 쩌렁쩌렁 소리를 질러. 그렇게 사람 좋은 척, 인자한 척하더니 다 가식이었어? 내가 저런 인간을 무해하다고 만나고 있었네.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구나.
그런데,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돌발행동을 하는 사람은 위험하다. 그가 분노하고 절망한 나머지 차도로 뛰어들면 어쩌지? 그래서 죽기라도 하면? 그럼 내 남은 인생은 뭐가 될까? 의심해서 누군가를 죽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소중한 내 인생을 이런 데서 망칠 수는 없었다.
나는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앞뒤좌우를 살폈다. 그가 보이지 없었다. 다행히 차도에 나뒹구는 사람도 없었다. 일단 다행이네. 그런데 어디로 간 거야?
그나저나 우리 얼굴도 못 보고 바로 헤어지는 건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을 거란 건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여보세요."
어? 받네?
"지금 어디야."
"화장실에 있어."
"화장실이 어딘데."
"2층."
"거기 계속 있을 거야? 나와."
"..."
"나와서 얘기해."
"...알았어."
"안에선 창피해서 얘기 못하니까 밖으로 나와."
"그래."
스타벅스에 다시 들어갔다. 사람들은 관심 끄고 각자 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 테이블에서 내 가방과 제비꽃이 가져온 쇼핑백과 그의 가방을 들었다. 커피는 버리고 나왔다. 햇볕은 아까보다 더 쨍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길에 멍하니 서 있었다. 가만 있다가 봉변당한 기분이었다. 제비꽃이 사람들 있는 데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희한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그가 길길이 날뛸 때 황당하긴 해도 안 무서웠다. 뭐랄까? 좀... 아줌마 같았다. 엄마가 화낼 때처럼, 무섭다기보단 귀가 따가웠다. 때리거나 집기를 부술 것 같다는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됐건 이제 그와는 끝이다. 사람들 앞에서 감정조절 못하고 발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지금껏 내게 얼마나 잘해줬든, 얼마나 노력했든 상관없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그가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