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26)
드디어 최종까지 왔다. 이제 영광의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을까? 피날레라 함은, 화려한 백수생활의 피날레다. 사실 화려하지 않고 구질구질했다.
그동안 많은 회사에 지원했다. 지원한 곳의 반은 서류에서 광탈하고, 나머지도 전부 1차 면접에서 떨어졌다. 실무진들이 날 안 좋아하는 모양이다. 내가 말 안 듣는 후배 관상인가?
그러나 이번 회사는 달랐다. 1차 면접에 철썩 붙었고, 임원과 사장 최종 면접 분위기도 괜찮았다. 면접을 보고 나오니 오후 6시가 넘어 있었다. 제비꽃이랑 모처럼 평일 저녁 데이트 하기로 했는데, 면접 본 혜화동에서 약속 장소인 신논현 역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다.
혜화역에서 4호선을 탔다. 핸드폰으로 지도앱을 켜서 경로를 검색하다, 카메라를 셀카 모드로 켰다. 뭐야, 얼굴이 왜 이렇게 초췌해? 개기름이 화장을 다 먹어서 번들거리고 시커맸다. 대학생 땐 아무것도 안 발라도 피부가 뽀얬는데, 이젠 화장을 아무리 빡세게 해도 반나절만 지나면 이 모양이다.
'빨리 가서 화장 고치고 만나야지.'
신논현 역에 도착했다. 시간은 7시 5분. 마음이 급했다. 약속시간이 이미 5분이 지나 있었다.
- 제비꽃, 면접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좀 늦을 것 같아요. 한 15분 정도? 미안해요.
카톡을 보내자마자 답장이 왔다.
- 괜찮아요
- 면접 보느라 힘들었을 텐데 천천히 조심해서 와요
역시 사족을 달아서 엑스트라 스윗함을 보여주는 제비꽃. 빨리 얼굴 수습하고 뛰어가야지.
지하철역에서 화장실 푯말을 보고 급하게 들어갔다. 화장실엔 아무도 없었다. 서둘러 세면대로 가서 화장품 파우치를 열었다. 쿠션, 립스틱, 눈썹 펜슬, 아이섀도. 초라한 구성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장비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이다.
쿠션을 열어 스펀지를 팍팍팍 찍어서 얼굴을 탁탁탁 두드렸다. 시커멓던 얼굴이 마법처럼 밝아지기 시작했다. 역시 입생로랑 쿠션이 짱이야. 칙칙한 눈 밑을 톡톡 두드리고 콧등과 인중도 꼼꼼히 두드렸다. 이 정도면 피부는 됐다. 이제 흐려진 눈썹을 그려줄 차례였다.
갑자기 뒤에서 어떤 아저씨가 들어왔다. 깜짝이야. 정신병잔가? 청소 아저씨도 아닌데 여자 화장실에 왜 들어와? 아저씨는 급했는지 왼쪽으로 돌아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괜히 뭐라고 했다가 나쁜 꼴 당할까 가만히 있었다. 빨리 하고 나가자. 눈썹 펜슬을 쥐고 거울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또 어떤 아저씨가 들어왔다. 사람들이 오늘 단체로 미쳤나? 그가 나를 슬쩍 보더니 옆쪽 칸으로 들어갔다. 뭐야, 이 사람들 이상해.
뭔가 쌔한 느낌이 들었다. 뒷걸음질 쳐서 안쪽을 보았다. 이때, 그동안 한 번도 못본 풍경을 보았다. 바로 벽에 줄지어 있는 소변기들. 남자화장실이었다…!
너무 놀라서 소리도 못 내고 서둘러 파우치를 챙겨서 뛰어나왔다.
"헉..헉..."
미친 건 나였다. 너무 창피했다. 개찰구 근처 구석에 쭈그려 앉아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남녀 성별만 바뀌었으면 바로 경찰서 행이다. 아무리 착각을 해도 그렇지, 30년이 넘게 여자로 살아왔는데 남녀 화장실 구분도 못하냐구.
서둘러 출구로 나갔다. 빠르게 걷다 보니 어느새 약속 장소가 나왔다. 들어가기 전, 출입문 앞에 서서 손거울과 눈썹 펜슬을 꺼내서 대강 마무리했다.
"제비꽃! 미안해요. 넘 늦었죠."
"괜찮아요. 멀리 오느라 힘들었죠?"
"아니에요. 제비꽃도 퇴근하고 오느라 고생했어요."
우리는 스테이크 콤보 화이타 플래터와 크랩 로제 파스타를 시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딱 봐도 소개팅 중인 테이블이 많이 보였다. 우리도 저 중 하나였었는데, 어느새 연인이 되어 있었다. 저 중 연애로 이어지고 결혼까지 하는 커플은 얼마나 될까?
정작 우리의 결론은 어떻게 날까? 결혼일까, 이별일까? 제비꽃의 마음은 어떨까? 제비꽃은 지금껏 우리의 미래에 대해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오늘 면접은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최종까지 간 게 처음이라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어요."
"잘 됐네요. 이번엔 꼭 붙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1차 때 면접 본 팀장은 문 앞까지 배웅하시더라구요. 이번엔 진짜 느낌이 좋아요.”
지금껏 면접 보면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은 곳이 많았다. 면접관이 대놓고 인신공격을 한 곳도 있었고, 어디 깡촌 리조트에 불러놓고 PT, 단체 면접, 개인 면접을 보고선 교통비도 주지 않은 곳도 있었다. 나는 그저 구직자일 뿐인데,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할까? 그들은 나보다 먼저 고용되어 인사 업무를 하고 있을 뿐인데, 마치 자기가 하늘 꼭대기에 있는 양 갑질을 해댔다.
"오늘 고생했으니까 2차는 류미 씨가 골라요."
"음... 가고 싶은 데가 있어요."
"어딘데요?"
"따라와 보면 알아요."
길 건너 골목으로 들어갔다. 저 앞에 지하로 내려가는 불빛이 보였다. 바로 LP바 제플린. 계단 초입부터 쿵쿵 음악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기 전에 제비꽃에게 말했다.
"근데 좀 시끄러울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아... 그래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면에 보이는 스크린에는 콜드플레이의 UP&UP 공연 실황이 나오고 있었다. 그래 이거지! 가슴이 쿵쿵대며 1초 만에 기분이 최고조를 찍었다.
"음악 소리가 크네요."
"네?"
"음악소리가! 크다구요!"
"맞아요! 좀! 크죠!"
우리는 스크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스크린 바로 앞에 거대한 스피커가 있어서, 대화를 하려면 거기서 멀어져야 했다. 대학 동기들이랑 오면 무조건 스크린 근처에 자리 잡고 대화 없이 음악만 듣는다.
그런데 제비꽃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우리 뭐 시킬까요?"
"저는 여기 오면 기네스 생맥주 마셔요. 제비꽃도 기네스 어때요?"
"좋아요."
우리는 기네스 생맥주 2잔을 시켰다. 평일인데도 테이블이 반쯤 차 있었다. 사장님이 있는 바 뒤편엔 엄청난 수의 LP판이 꽂혀 있었다. 바에서 직접 판 돌리는 주인아저씨 스웩이 엄청났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공간을 꿈꾸지 않을까.
중학교 때 락음악을 접한 이후 고등학교 땐 메탈에 빠져 살았다. 애석하게도 여고에는 메탈을 듣는 친구가 없었다. 하루는 야자 시간에 CDP(맞다, 시디플레이어)를 듣고 있는데, 친구가 귀에서 이어폰을 빼서 듣더니 말했다.
"류미! 너 또 이런 거 들어?"
이런 거라니. '대 메탈 음악'이라구. 이상한 음악을 듣는 여고생은 당시 신촌 백스테이지와 대학로 뮤직팩토리의 컴컴한 지하에서 웰치스를 마시며 뮤직비디오를 감상했다. 고정 신청곡은 '건즈 앤 로지스'의 '노벰버 레인'이었다.
고2 땐 음악 동지들을 찾아 메탈 동호회에 들었다. 생애 최초 사회생활이었다. 카페에서 주최한 음감회에 나가고 공연도 함께 보러 다녔다. 한 번은 뒤풀이로 감자탕을 먹으러 갔는데, 20대 언니가 감자탕에 있는 고기를 발라서 앞접시에 놔줬던 기억이 난다. 쎈 음악을 좋아했지만 순둥순둥했던 사람들. 그때 언니 오빠들은 지금 뭘 할까? 회사 다니면서 애 키우고 살까?
"제비꽃, 이 노래 알아요?"
마침 메탈리카의 ‘엔터 샌드맨’이 나오고 있었다.
"아뇨, 몰라요."
"이... 유명한 곡을 몰라요?"
"네 처음 들어요."
그렇구나. 이렇게 유명한 곡은 들어봤을 만도 한데.
"이게 메탈리카라는 밴드인데, 저 내한공연 두 번이나 갔거든요. 미친듯이 짱이었어요."
"그랬군요."
제비꽃이 말없이 기네스를 홀짝였다. 나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후렴부를 따라 불렀다. 면접도 끝났겠다, 맛있는 저녁도 먹었겠다, 맥주에 락음악이면 천국 인정?
다음으로 연달아 AC/DC, 프린스, 개리 무어가 나왔다. 선곡 끝장나네.
"제비꽃, 이 곡도 몰라요? 엄청 유명한 곡인데."
"처음 들어요."
"좋지 않아요? 옛날에 진짜 많이 들었거든요. 제 청소년기를 함께한 음악들이에요."
"그렇군요. 근데 솔직히... 저한텐 너무 시끄러워요. 음악이 좋은지도 모르겠구요."
"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락음악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는 좋다고 느껴야 하지 않나? 백번 양보해서, 안 좋아도 여친님이 좋다고 하면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류미 씨, 미안한데 우리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가면 안 될까요?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머리가 아파요."
뭐야, 심지어 나가자고? 한창 신나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이 확 샜다.
"알겠어요."
나는 반 이상 남은 기네스를 꿀꺽꿀꺽 마셨다.
"아, 천천히 마셔요. 조금 더 있다 나가도 돼요."
"됐어요."
남은 맥주를 한 방울까지 다 마셨다.
"가요."
제비꽃과 나는 짐을 챙겨서 계산하고 나왔다. 등뒤로 내가 좋아하는 오아시스의 곡이 나오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사무치게 추웠다. 이렇게 음악적으로 안 통하는 남자와 만나도 되겠냐구. 나중에 결혼하면 자식 낳아서 셋이 락페스티벌 다니는 게 꿈이었는데, 이렇게 재미없는 남자와 미래를 약속해도 될까?
맞다, 제비꽃은 내게 미래를 약속한 적 없지.
제비꽃이 말했다.
"류미 씨, 제가 청각에 좀 민감한 편이에요. 식당에서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좀만 크게 나도 신경이 쓰여요. 이해해 주세요."
"괜찮아요. 그런 음악 안 좋아하는 사람들은 힘들 수 있어요."
"다음에는 우리 클래식 공연 보러 가요. 류미 씨 음악 좋아하니까 클래식도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제발 클래식만은... 내가 유일하게 안 듣는 음악이 클래식이다.
"그래요. (후우…) 다음에는 클래식 공연 보러 가요."
처음부터 취향이 딱 맞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그렇다면 난 왜 그와 사귀었을까? 그저 마음이 짠해져서? 그게 다일까? 사랑은 동정이 아닌데 말이다.
내가 그에게 가진 감정이 그저 짠함뿐인지, 아니면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인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