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25)
제비꽃은 스윗한 남자였다. 섬세하고, 감성적이고, 감수성 풍부하고, 상대방 마음 잘 알아주고. (다 같은 말인가?) 그러나 서서히 이 사실도 깨닫게 됐다. 그는 밴댕이 소갈딱지다.
"아 짜증나!"
난 밴댕이 소갈딱지는 질색이다. 남자가 속이 좁을 것 같은 기미만 보여도 사귀지 않았던 나다. 그런데 완전히 잘못 걸렸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절대 먼저 연락하지 말아야지. 혼자 그렇게 가버리고 연락 없는 사람에게 먼저 손 내밀고 싶지 않았다.
노트북을 열고 오른쪽 구석에 있는 폴더를 열었다. 이력서나 써야지. 이력서를 써야 면접에 가고, 면접에 합격해야 취업하고, 취업해야 연애를 하고, 연애를 해야 결혼도…. 그런데 취업이고 연애고 왜 이렇게 안 되냐. 오늘은 마음을 비우고 이력서나 쓰자. 핸드폰을 노트북 옆에 뒤집어 놓았다. 절대 안 봐.
1분 후.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 연락이 없었다. 다시 핸드폰을 뒤집어 놨다.
'집중하자 집중... 지금 중요한 건 취업이야. 이력서 쓰는 데 집중하자. 이력서를 써야 면접에 가고, 면접에 합격해야 취업하고, 취업해야 연애를...'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뻗어 핸드폰을 뒤집어 봤다. 여전히 아무 연락이 없었다.
“아우 신경 쓰여!”
도무지 집중이 안 됐다. 아무래도 제비꽃을 해결해야 뭐든 할 것 같았다. 우리 사이를 확실히 결론지어야 한다. 일단 만나서 얘기를 해보자. 물론 나는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 답답해서 안 되겠으니까 내 할말만 하고 돌아와야지.
- 제비꽃, 잘 지내요?
- 그날 잘 들어갔죠?
- 왜 연락이 없어요? 이번 주말에 안 만날 거예요?
여기까지 보내고 카톡을 닫았다. 핸드폰을 책상에 뒤집어 놨다.
1분 후.
카톡을 열어서 확인했다. 아직 보지 않았다. 다시 뒤집어 놨다.
30초 후.
다시 카톡을 확인했다. 여전히 1이 안 없어졌다. 이거 이거... 안읽씹 당하는 거 아냐?
까똑!
오 왔다.
- 류미 씨, 전 잘 지냈어요. 그날 잘 들어갔구요.
- 주말에 만나요.
뭐야. '주말에 만나요'? 이게 다야? 어디에서 몇 시에 만나자는 말은 왜 안 하는데?
- 몇 시에 만나요? 어디서요?
- 류미 씨가 정해요. 제가 맞출게요.
왜 평소처럼 시간이랑 장소를 제시하지 않지? 별로 안 만나고 싶나? 혹시 나랑 헤어지려고 시큰둥하게 구나? 그동안 연락이 없던 이유도 그건가?
갑자기 불안해졌다. 저렇게 시간과 장소를 다 내게 맞추는 건 혹시 헤어지는 마당에 예의 차리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 나를 위한 마지막 배려 뭐시기 그런거. 불안한 마음으로 답장했다.
- 이번 토요일 저녁 6시에 경복궁역에서 만나요.
- 그래요. 잘 지내요 류미 씨.
'잘 지내요 류미씨'? 이건 또 뭐야. 주말에 만날 때까지 연락을 안 할거야?
그랬다. 제비꽃은 이 답장을 끝으로 약속 날까지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이럴 수가... 난 뭔가를 하는 둥 마는 둥, 이력서도 대충 쓰며 시간을 죽였다. 주말까지 100년은 흐른 것 같았다.
토요일 오후 6시 경복궁역 1번 출구. 한겨울이라 이미 주변이 깜깜했다. 제비꽃이 횡단보도를 건너 왔다.
"제비꽃, 오랜만이에요."
"네 류미 씨. 저녁 먹어야죠?"
"아뇨. 우리 어디 가서 술 한잔 해요."
나는 대답을 듣지 않고 말했다.
“보안여관으로 가요 우리.”
“여관이요? 류미 씨 저기 너무 좀...”
아놔. 사람을 뭘로 보고. 물론 그곳의 이름이 여관이긴 하다.
“저기요, 여관이 그 여관이 아니거든요. 통의동 보안여관 검색해 봐요. 보안여관 옆에 술집이 있어요."
나는 제비꽃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제비꽃은 조용히 내 옆에서 걸었다. 날씨가 많이 추웠다. 손이 시렸다. 걸어가며 손등이 스쳤지만, 그는 내 손을 잡지 않았다. 이건 무슨 신호일까? 손이 시린 것도 잊을 만큼 불안해졌다. 그가 밴댕이 소갈딱지라 밉긴 하지만, 나는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을까?
어느덧 보안여관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니 몇 개 없는 테이블은 만석이었고, 바 자리만 겨우 남아 있었다.
"여기 앉죠."
바에 나란히 앉았다. 직원이 메뉴판을 건넸다.
"저는 버드나무 브루어리 미노리 세션이요."
"저는... 안동소주 잔술로 주세요."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제비꽃이 할 말을 준비해 왔을까? 어찌 됐건, 나는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술이 나왔다. 우리는 말없이 잔을 부딪혔다.
"맛있네요. 저 이 소주 좋아하는데 잘 없더라고요."
"네 많이 마셔요."
또 다시 정적. 아 답답해. 나는 아무 말도 먼저 꺼내지 않을 것이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절대. 한 마디도. 먼저. 하지. 말아야지.
우리는 각자 앞만 보고 술을 홀짝였다. 바 담당 직원이 우리가 앞만 보고 있으니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자꾸 바깥으로 나갔다.
'독하다. 10분 동안 한 마디를 안 하네.'
하긴, 지난번 강화도에서는 30분 넘게 가만히 있던 사람이다. 맘 느긋이 갖고 맥주 한 병 더 시켜야지.
"류미 씨."
드디어 제비꽃이 입을 열었다.
"네."
"그날 집에 가서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건 내가 헤어지기 전에 많이 써먹던 멘트인데?
"그날 거의 한숨도 못 잤어요."
아니... 오빠라고 안 부르는 게 그렇게 심각한 일이야?
"단순히 오빠라고 안 불러서 그런 건 아니에요."
독심술산가?
"그날 꼼장어집에서 류미 씨가 상황극 할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왜요? 장난이잖아요."
"알아요. 하지만 나한테는 그저 장난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류미 씨가 예전에 다른 남자들한테 그렇게 했을 거란 걸 알아요."
"무슨 소리예요. 나 원래 상황극 하는 거 좋아해요. 다 꾸며낸 거지 한 번도 그래본 적 없어요."
"나만 빼고 다 오빠라고 부르고..."
또 저러네. 지긋지긋한 오빠 소리.
"내가 개나 소나 다 오빠라고 부른 건 맞지만, 그만큼 오빠라는 호칭이 무의미하다는 뜻이라니까요. 나는 제비꽃이 단 하나뿐인 존재라서 그에 걸맞게 부르고 싶을 뿐이에요. 얼마나 더 얘기해야 알아들을래요."
"..."
진정 답답하다. 그래서 뭐, 나랑 헤어지기라도 할 거예요? 겨우 이런 일로?
"류미 씨, 있죠. 내가 왜 대학원 박사까지 못 하고 나왔는지 알아요?"
"그 얘기는 안 해줬어요."
"저 대학원 다니면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막차 타고 퇴근했어요. 매일요. 주말에도요. 그렇게 죽어라 했는데, 교수님이 어느 날 부르더라고요. 아무래도 박사는 힘들 것 같으니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그래서 곧바로 그만뒀어요. 그러고는 몇 달 동안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틀어박혀 있었어요."
그가 소개팅 때 석사만 했다면서 얼굴이 어두워지길래 뭔가 있다곤 생각했다. 그런데 교수가 내보내서 그런 거구나. 상처가 됐을 만도 하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래요. 나도 석사로 끝냈고, 지금 재취업도 못하고 빌빌대는 거 제비꽃도 알잖아요."
"그리고요."
그가 한참을 뜸 들였다.
"원래는 미국에 유학 가려고 했거든요. GRE 점수를 높게 받아서 될 줄 알았는데, 다 떨어졌어요. 열 군데 지원했는데 전부 다요."
"나는 영어 못해서 GRE는커녕 토익 점수도 엄청 낮아요. 나는 영어 잘하는 사람 부럽던데, 유학 못 간 게 뭐 대수예요?"
학업 쪽에 운이 없군. 아니면 중요한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데 요령이 없거나.
"그리고요."
그는 또 뜸을 들였다.
"군대에서 선임 잘못 만나서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어요. 그때 우리 내무반 사람들 다 힘들어했는데 저만 머리가 빠지더라고요. 머리숱은 그때 다 없어진 거예요."
유전이 아니라 스트레스성 탈모였네. 하지만 스트레스성 탈모가 이 정도로 복구가 안 된다고? 내 지인들은 한때 스트레스로 머리가 빠져도 다시 풍성하게 나던데. 물론 속으로만 말했다.
"그리고요."
그는 또 뜸을 들였다.
"어렸을 땐 잘 살았는데, 아버지가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해서 집이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공부에 집중을 못해서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못 했어요."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우리 집도 아빠가 사업하다 시원하게 말아 드시고 그것땜에 이혼까지 했는데요 뭐.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물론 거짓말이다. 집이 망하고 부모님이 이혼했는데 어찌 아무렇지도 않겠는가? 하지만 타격이 많이 크진 않았다. 아빠가 사업을 크게 해 보고, 쫄딱 망해도 보고, 화려하게 재기하고, 이혼해서 자유롭게 사는 모습도 괜찮아 보였으니.
"그리고요.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았는데, 서울로 이사하면서 환경이 많이 바뀌었거든요. 그때부터 성격이 내성적이 되어서..."
"잠깐만요. 어디까지 갈 거예요? 이러다 신생아 때까지 가겠어요. 요점이 뭐예요? 인생이 힘들었다는 거? 그날 나랑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언제 얘기할 거예요. 이렇게 신세 한탄만 하고 있으면?"
"나는요, 살면서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린 적이 별로 없어요. 항상 기대를 많이 하고 뭔가 시작하면, 끝은 내 기대와 다르더라고요. 류미 씨랑 만나는 것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자신이 없네요."
왜 다른 남자들한테 애교 부리는 걸 질투하다 인생 한탄까지 이어지냐구. 하지만 그가 왜 이러는지 어렴풋이 감이 왔다.
그의 과거 연애가 맘처럼 됐으면 나랑 이러고 있겠는가? 연애가 뜻대로 안 됐으니 흘러 흘러 나한테까지 왔을 것이다. 그런데 안 풀린 과거 연애 얘기들을 나한테 차마 말 못하니, 지금껏 안 풀린 인생을 말하면서 우리 관계에서 자신감이 0으로 수렴했음을 넌지시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하아… 이 사람. 왜 이렇게 나를 자극하는 거냐.
난 옛날부터 그랬다. 주눅 들거나 슬퍼 보이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괜찮다고 다독이고, 용기를 주고, 시답잖은 농담을 퍼부어 피식이라도 웃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렸다.
제비꽃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내 여린 부분을 정확히 공략하다니. 사실은 고수 아냐?
나는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잊어버렸다.
"제비꽃, 지금 우는 거 아니죠? 자 봐요. 제비꽃 그런 일들이 있을 때 옆에 누가 있었어요? 누가 있었건, 어쨌든 나는 아니죠? 이제는 류미가 있잖아요. 뭐가 걱정이에요. 나는 영어도 못하고 현재 백수지만, 생활력 하나는 끝내줘요. 나를 믿어요. 나한테 기대면 돼요."
"...류미 씨, 고마워요. 근데 이건 내 문제라 류미 씨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제비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 마찬가지예요.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묶여 있잖아요. 지금 제비꽃은 자기 연민에 빠져 있어요. 그게 얼마나 위험한 줄 알아요?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도 독이에요. 이제부터 새로 시작하면 돼요.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예요? 현재 좌표를 확인하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야죠. 나랑 같이 하면 돼요."
"자기 연민이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영 자신감이 생기질 않네요."
이 정도 말하면 기분 풀 줄 알았는데. 자기 세계에, 그것도 과거에 아주 콕 틀어박힌 사람이었다. 이렇게 패배주의에 빠진 사람은 위험한데.
조금 더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제비꽃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까지 얘기해도 모르겠어요? 제비꽃이 할 일은 내 손을 잡는 거예요. 이제 내 손 잡고 달리기만 하면 돼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자, 달릴 준비 됐어요?"
이것은 거의 프로포즈다. 흥분해서 선을 넘어버렸네. 솔직히 나야말로 밴댕이 소갈딱지 운운하며 헤어져야 하나 궁리하던 게 며칠 전인데, 거의 결혼하자고 말한 꼴이었다.
"..."
야... 내가 이렇게까지 했으면 "고마워요 힘낼게요!"라고 해야 정상이지. 하…. 구제불능인가. 그는 여전히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나가요 우리."
우리 앞에는 맥주 4병과 소주 잔 3개가 놓여 있었다. 이 정도면 알딸딸해야 하는데, 성질이 나서 정신이 말짱했다. 문을 열고 나왔다. 밤이 늦어 날이 더 추워졌다. 빨리 경기도로 보내고 난 집에 가서 넷플릭스나 봐야지. 다음은 나도 모르겠다. 나를 놓치든지 말든지.
물론 상황을 보니 우리가 헤어질 것 같진 않았다. 그가 저러는 건 그저 불안해서이니, 나를 차버리지는 않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차이는 건 싫어!)
사실 공은 내게 있었다. 나야말로 자신감 없고, 인생의 굵직한 목표를 이루지 못한 남자를 계속 만나야 할까? 아까는 풀 죽어 있는 그를 격려해주고 싶어서 오버했지만, 사실 나도 희망차고 자기 삶을 잘 꾸려가고 잘 풀리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류미 씨."
제비꽃이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아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용기를 가져볼게요. 오늘 류미 씨 만나서 정말 좋았어요. 많이 보고 싶었거든요. 지난주엔 먼저 연락하려고 했는데... 류미 씨가 화 났을 것 같기도 하고,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못했어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힘내고, 우리 또 잘해봐요. 얼른 들어가요. 오늘 집에 가면 먼저 연락해요."
"그래요 류미 씨. 조심히 들어가요."
제비꽃을 보내고, 경복궁역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아직 막차 시간이 남아 있었다. 사직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얀 입김이 퍼져 나왔다.
나는 깨달았다. 처음부터 그에게 끌린 이유가 그의 굳은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다'고, '힘 내라'고 응원하고 싶어서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위기가 온 오늘, 제비꽃의 우울한 얼굴이 밝아지길, 두 눈이 반달이 되고 활짝 웃는 입과 귀여운 보조개를 볼 수 있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함께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도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생이 잘 안 풀리고 자신감 없고 울적한 남자와 함께해도 괜찮을까? 그와 함께 서서히 우울의 늪으로 빠져드는 건 아닐까?
어찌 됐건, 아직까지 우리 관계는 현재진행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