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24)
연말을 맞아 제비꽃은 이틀 연차를 냈다.
"어차피 연차 남아도 돈으로 안 줘서요."
핸드폰 너머로 그의 불만스러운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류미 씨,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뭐 해요?"
"선약이 있긴 한데, 잠깐 얼굴만 비추고 나오면 돼요. 저녁에 볼래요?"
"아 약속이 있구나. 그럼 괜찮아요. 다음 주에 만나요."
주말 내내 약속이 있어 이번 주말엔 데이트를 못할 예정이었다. 요즘은 매일매일 보고 싶었다. 특히 얼마 전 거사를 치르고 한층 더 가까워진 상태라 더더욱.
"아니에요, 이번 주말에 못 보는데 만나야죠. 그날 약속 가서 잠깐만 있다 나올 테니 만나요. 8시면 넉넉할 것 같아요."
"그래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꼼장어요."
"꼼장어요?"
"네. 종각 쪽에 공평동 꼼장어라고 제가 좋아하는 집이 있어요.”
"그래요 그럼. 금요일 8시에 거기서 봐요."
"근데 웨이팅이 있을 수도 있어요."
"제가 조금 일찍 가서 자리 맡아놓을게요. 류미 씨는 천천히 와요."
"에이 날도 추운데... 제비꽃도 시간 맞춰서 와요."
"그건 알아서 할게요. 걱정 마요."
추운 겨울밤 지글지글 구운 꼼장어를 상추쌈에 싸서 소주 한잔이랑 먹으면, 크으으~~ 아저씨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환상적이지. 벌써부터 침이 고이는 것 같았다.
금요일 저녁 6시, 종로에서 대학 동기들을 만났다. 생각보다 애들이 많이 나왔다. 2명이 내년에 결혼한다더니 얼굴 비추러 왔구먼. 대학 시절 술 먹고 사고 치고 다니던 애들은 이제 대기업에 다니며 배 나온 아저씨의 삶을 살고 있었다.
"야 2학년 때 민석이랑 술 먹다가 옆 테이블이랑 시비 붙었잖아. 근데 막상 그쪽에서 우리한테 오니까 이 자식 취해서 자는 척했어."
"야, 나 그때 기억 없다니까."
"걔네들 딱 보니까 조폭처럼 생겨서 내가 무릎 꿇고 빌었다니까. 내가 안 그랬으면 우리 그때 죽었어."
"오바하기는. 야 근데 준상이도 뭐 사고 치지 않았냐?"
"준상이는 술집에서 주먹으로 창문 깼지. 미친놈."
"덩치도 큰데 사장은 얼마나 무서웠겠냐."
"야 우리 그것도 있잖아. 영훈이랑 민재 선배랑 연대 축제 놀러 갔을 때, 주점에서 술 먹다 취해가지고 연대 신입생들이랑 패싸움했잖아. 낄낄. 싸우다가 걔들 도망가서 우리끼리 신촌 가서 술 더 마셨잖아. 그때 진짜 웃겼는데."
동기들이 나누는 그 시절 이야기에 입이 떡 벌어졌다. 저렇게 한심할 수가.
추억이라고는 온통 술 먹고 사고 친 얘기밖에 없었다. 입담들이 좋아서 웃기긴 한데,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저렇게 막장 인생으로 대학 시절을 보낸 종자들이 예쁜 여자랑 결혼하고 대기업에서 연봉 7000만원씩 받고 일한다는 사실이. 대학 시절, 난 통금이 있어 밤 11시까지 무조건 집에 들어가야 했다. 내가 떠난 깊은 밤 술자리에서 저런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었다.
가만 보면 그때의 통금이 억울했다. 얘네들의 진상 활극을 놓쳐서가 아니다. 바로 늦은 밤 술자리에서 선후배들과 있었을지 몰랐던 썸을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술자리는 연애의 치트키 같은 거였다. 대부분의 역사는 밤 11시 넘어 이뤄졌다. 새벽까지 술자리를 가진 다음 날, 존댓말 하던 남녀 선후배가 갑자기 반말을 하고, 때로는 연인이 되어 손을 잡고 나타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술자리의 힘!
11시 통금을 맞추려 10시에 술자리에서 나오면 어찌나 눈물이 흐르던지, 지금까지 한이 될 지경이었다. 그 시절 더 적극적으로 놀고 썸 타고 연애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지금쯤 초등학생 학부형이 되어 결혼 걱정 따윈 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얼굴만 비추고 금방 나오려 했는데, 오랜만에 추억팔이 하고 소맥을 주고받다 보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문득 쌔한 느낌이 들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 2통-
♡♥제비꽃♥♡
시간은 8시 10분이었다.
"얘들아 나 먼저 갈게! 다음에 봐."
나는 핸드폰을 가방에 쑤셔 넣고 벌떡 일어섰다. 음식점을 나와서 전력질주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지? 다행히 종각까지는 뛰어서 10분 거리였다. 20분 지각이네.
공평동 꼼장어에 도착했다. 제비꽃이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미안해요 제비꽃. 헉헉. 어쩌다 보니 조금 늦었어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런데 전화는 왜 안 받았어요?"
"가방 안에 있어서 몰랐어요. 거기가 너무 시끄러워서 안 들렸나 봐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
소금구이 꼼장어 2인분이 막 나왔다. 초벌로 구워 나온 꼼장어를 석쇠 위에 불로 지졌다. 지글지글 환상적인 비주얼과 맛!
그런데 제비꽃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참 표정 관리 못하셔. 뭐가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야. 내가 전화도 안 받고 늦어서 삐졌구만. 나는 상추에 꼼장어 세 조각과 마늘 하나, 무쌈과 양파를 올리고 초고추장을 듬뿍 발랐다. 커다랗게 만든 쌈을 구겨서 손끝으로 모아 잡았다.
"제비꽃 아- 해봐요."
제비꽃이 입을 벌려 아- 했다. 쌈을 넣으니 입이 꽉 차서 볼이 부풀어 올랐다. 우적우적 씹는 입술 밖으로 상추가 조금 삐져나왔다. 그가 손으로 삐져나온 상추를 집어넣고 씹다가 꿀덕 삼켰다. 아이구 귀여워라.
"류미 씨가 싸주니까 더 맛있어요."
제비꽃은 무쌈을 펴서 꼼장어 한 조각과 마늘 하나, 양파를 놓고 초고추장을 찍어 발랐다.
"류미 씨도 아-"
나도 와앙 하고 먹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내가 쌈까지 먹여줬는데 왜? 참 소심하고 쪼잔...섬세하셔, 정말. 그렇다면 이 류미가 초특급 애교를 부려주지.
"아까 대학 동기들 만나서 옛날 얘기 했거든요. 걔네들이랑 볼꼴 못 볼 꼴 다 보고 지냈는데, 그때가 그립더라고요. 제비꽃이랑도 대학에서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류미 씨는 나 별로 안 좋아했을 거예요."
"무슨 소리예요. 좋아했을 거 같은데요? 술자리에서 계속 말 걸고. "
"저 대학 때도 내성적이었어요. 술자리는 많이 나갔는데, 보통 조용히 술 마시면서 사람들 얘기 들어주고 그랬어요. 여자 동기들도 나 별로 관심 없어했고."
또 짠해졌다. 이런 말 하면 미안하지만, 제비꽃은 대학 때 인기 있을 타입은 아니었다. 조용히 사람들을 챙겨주지만 전혀 돋보이지 않고, 누군가를 짝사랑해도 당사자가 당최 알 수 없도록 소심하게 다가가는 스타일. 자신 있게 어필해 여자친구를 만들기 힘들었을 것이다.
좋아, 오늘 제비꽃과 나의 묵은 한을 풀자.
"그럼 우리 대학생인 척하고 상황극 해볼래요? 우린 선후배 사이예요. 같은 동아리에 있는."
"아니에요. 나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에이~ 그러지 말고! 제비꽃은 선배, 나는 후배. 내가 한번 꼬셔볼게요. 실제로 대학 때 만났으면 내가 제비꽃 꼬셨을지도 몰라요."
"...그래요. 류미 씨 하고 싶은 대로 해봐요."
너무 재밌을 거 같아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빠, 오늘 동아리 발표회에서 진짜 멋졌어요. 한잔 받으세용~"
"응."
제비꽃이 잔을 들고 로봇처럼 들어 올렸다.
"오빠 근데 술 잘 마셔요?"
"응."
"그런데 왜 술이 그대로 있어요? 원샷해요!"
"응."
제비꽃이 잔에 남은 소주를 원샷했다.
"아이 오빠 잘 마시네. 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만큼 술 채워줄게요."
"응."
소주를 콸콸 따라서 넘치기 직전에 딱 멈췄다. 이야, 내가 봐도 남자 잘 꼬시는 후배 같네.
"오빠 이것도 마셔요. 원샷!"
"..."
제비꽃이 반 정도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았다.
"에이 오빠 이게 뭐야~ 다 마셔야지! 원샷인데. 그거 몰라? '이거 원샷하면 오늘부터 사귀는 거다.' 기본을 모르네!"
"그만해요."
아 왜 또! '그만해요'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왜 꼭 재밌어질라 하면 그만하라고 하지? 난 그만하고 싶지 않아.
"오빠, 그럼 내가 꼼장어 먹여줄게요. 꼼장어를 집어서 초고추장에 찍고, 여기에 양파를 올려서 아~"
제비꽃은 무미건조하게 입을 벌려 내가 내민 꼼장어를 먹었다.
"그럼 이제 소주 마셔야죠! 남아 있는 거 원! 샷!"
"류미 씨."
"아 왜요~"
"대학 때 남자들한테 오빠라고 불렀어요?"
당황했다.
"아 아니... 그냥 나이 많은 선배들을 오빠라고 하기는... 했죠. 선배라고도 부르고."
"그런데 왜 나는 오빠라고 안 불러요?"
사귀는 날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다'를 유일한 조건으로 내세운 이후 그를 시종일관 '제비꽃 씨'라고 불렀다. 여기에 앙심을 품고 있을 줄이야.
"아니... 나는 남자친구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다니까요. (사실 나이 많은 전 남친들을 다 오빠라고 불렀다) 사귀지도 않는 나이 많은 남자들을 애칭으로 부를 수 없으니 오빠라고 부를 수밖에요. 그러니까 개나 소나 다 오빤데, 그중 하나가 되고 싶어요?"
"네."
난감하네. 오빠라고 부르는 거,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나는 가부장적이고 오빠병 걸린 사람을 걸러내려고 이 조건을 붙인 거다. 하지만 그렇게 고른 상대방이 이렇게 집요하게 굴 줄이야. 나는 정말이지 오빠라고 안 부르고 싶었다.
우리는 말없이 꼼장어를 집어먹었다. 분위기가 이러니 꼼장어가 맛있을 리 없다. 급속도로 냉각된 분위기처럼 남은 꼼장어도 식어서 말라비틀어졌다. 후식으로 김치 칼국수도 먹어야 되는데 입맛 다 떨어졌다. 소주도 남았는데.
"이만 나가요."
나도 토라져서 짧게 말했다. 우리는 가게를 나와 무작정 걸었다. 바로 앞에 조계사가 나왔다.
"우리 들어가 볼래요?"
조계사는 오며 가며 밖에서만 봤지 실제로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좋아요."
우리는 조계사로 들어가 천천히 둘러봤다.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고즈넉한 공간이 있다니. 대웅전에는 불이 켜져 있고, 살짝 열린 문 안으로 커다란 불상이 보였다. 가톨릭 (냉담) 신자이지만, 마음이 더없이 편해졌다. 여기저기 은은하게 밝힌 조명과 촛불 덕에 운치 있었다. 마음이 홀리해졌다. 절에서 홀리해지다니, 말이 돼? 하지만 정말 그랬다.
어느새 제비꽃과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한겨울 바람도 끄덕 없이 굳건한, 따뜻한 손.
나는 마음속으로 준비한 말을 신중히 꺼냈다.
"제비꽃... 나한테 제비꽃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예요. 누구든 오빠로 부를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제비꽃만은 다른 호칭으로 부르고 싶어요. 오빠라는 호칭은 친오빠한테도 쓰고, 아무한테나 다 쓰잖아요. 그렇게 남발되고 무의미한 호칭, 나는 싫어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한텐 걸맞은 호칭을 써야죠. 안 그래요? 그게 상대방에게 표현하는 최고의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이래도 오빠라고 불렀으면 좋겠어요?"
"네."
아... 이 아저씨 오빠병 심하게 걸렸네. 이렇게 불심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느낀 게 없나? 공수래공수거. 옴마니반메훔.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오빠가 뭐가 중요해? 사람이 사랑을 얻었으면 마음을 비우고 살아야지. 왜 이렇게 오빠에 목을 매는 거야? 오빠면 어떻고 제비꽃이면 어떻고 거북이면 어때.
분위기가 다시 차가워졌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는 경기 남부로 가는 막차를 타러 정류장으로 뛰어갔고, 나는 뒤에 홀로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