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에 빠지다

편집증 시대의 연애(36)

by 류미

한참을 걸었다. 어느새 가로등도 없는 컴컴한 길을 걷고 있었다. 분노는 잦아들고 조금 무서워졌다.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 2통

♡♥제비꽃♥♡


됐어. 안 받아. 나는 핸드폰으로 지도 앱을 켰다. 무서우니 어디라도 들어가자. 300미터 거리에 편의점이 있었다. 지도앱에서 내 위치를 새로고침하며 편의점에 도착했다. 편의점은 생각보다 넓었다. 안쪽으로 들어와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핸드폰을 보니 더 이상의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핸드폰 전원을 껐다. 핸드폰 끄고 잠적한 척해야지.


시간은 8시. 싸운 건 싸운 거고, 사람이 밥은 먹어야 살지. 진열대 앞에서 고민했다. 햄버거, 샌드위치, 핫바, 도시락, 어묵... 고민하다 제육볶음 도시락을 골랐다. 밥만 먹으면 섭하지. 냉장고에서 콜라도 하나 꺼냈다.


도시락을 전자렌지에 데우고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따끈한 밥과 제육볶음을 한 입 먹었다. 와 진정한 꿀맛! 호박볶음이랑 시금치, 김치도 환상이었다. 편의점 도시락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감동받아 눈물이 고였다.


왼쪽 편에는 커다란 통유리창이 있었다. 밖은 칠흑같이 캄캄해 아무것도 안 보이고, 창은 편의점 내부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밥을 먹는 내내 이상하게 저 창문이 불길했다. 어둠 속에서 누가 쳐다보는 기분이었다.


혹시 제비꽃이 따라온 건 아닐까? 아냐, 그럴 리 없어. 오면서 뒤를 여러 번 돌아봤는데 없었잖아. 그는 숙소에서 나오지 않은 게 확실했다. 나는 다시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번 불안감이 드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하긴, 그러고 나와서 밥을 먹는 거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


나는 입에 든 음식을 대강 씹어 삼키고, 밥이 두 숟갈쯤 남아 있는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콜라도 원샷한 후 선반에 놓인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자리에 돌아와 핸드폰을 켰다. 카톡이 5개 와 있었다. ‘읽음’ 표시를 안 하려고 미리 보기로 보니, 마지막 카톡은 이랬다.


-제비꽃: 사진을 보냈습니다


내가 속을 줄 아나? 카톡을 읽지 않으니 '사진을 보냈습니다'로 궁금증을 유발하려는 시도구나. 온 국민이 아는 뻔한 수법인데? 이 수법은 이를테면 헤어진 여친이 카톡 메시지를 보지 않자, ‘OO님이 선물을 보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써서 선물을 보낸 척하고, 뭔지 궁금해서 카톡을 열어보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뭐, 우리가 함께 나온 사진을 보내서 화 풀게 하려고? 뭐가 됐든 안 통한다. 아직도 날 모르나? 나는 핸드폰을 다시 껐다.


시간이 흘렀다. 편의점에는 여전히 손님이 없었고, 알바생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래, 편의점에 한 시간 넘게 앉아 핸드폰도 안 보고 멀뚱히 앉아 있으면 당연히 이상해 보이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컴컴한 길을 걸어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아주 멀리 간 줄 알았는데 2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숙소 밖에서 보니 불이 켜져 있었다. 그렇다니깐. 안 나왔어 이 인간. 문을 여니 제비꽃이 아까 그 자세로 앉아 있었다. 저러고 몇 시간째 있던 걸까? 야심한 밤에 내가 나갔는데 찾으러 나오지 않은 걸 보니, 우린 진짜 끝났네.


식탁에 가서 의자를 빼고 앉았다. 제비꽃은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커다랗게 한숨을 쉬며 식탁에 엎드렸다.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울적하게 말했다.


"제비꽃... 나 나가서 길 잃고 헤매다 겨우 들어왔어. 진짜 무섭더라. 가로등도 없고... 내일 아침에 일단 집으로 돌아가. 떨어져 있으면서 우리 사이 다시 생각해 보자. 내가 비행기 표 끊어줄게."


대답이 없었다. 난 다음 날 오전 비행기표를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켰다. 안 읽은 카톡 5개가 떠 있었다. 이젠 카톡을 읽어도 되겠지. 그가 카톡으로 보낸 사진이 뭐였을지 궁금했다. 카톡을 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낸 사진은, 편의점 쓰레기통 앞에서 휴지로 입을 닦는 내 모습이었다.


"뭐야!!!!"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편의점에 왔었어??"


제비꽃이 날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래. 내가 얼마나 걱정하면서 찾았는지 알아? 하도 뛰어다녀서 옷이 땀으로 다 젖었어. 전화도 안 받고. 정말 왜 그러니."


"나 어떻게 찾았어?"


"설마 하고 지도를 보니까 근처에 편의점이 있더라. 가면서도 설마설마 했어. 밖에서 보니까 류미가 쓰레기통에 뭘 버리고 있더라고. 휴지로 입 닦고."


"그... 그럼 들어와서 나를 데리고 갔어야지! 왜 변태처럼 사진만 찍고 혼자 돌아왔어?"


"맥이 탁 빠지더라. 아, 쟤는 내가 없어도 잘살겠구나. 괜히 걱정했네. 그래 편하게 놀다 돌아와라, 이런 생각이었지. 근데 뭐 먹은 거니?“


"...제육 도시락."


"그래 잘했네. 잘 먹어야지. 배고팠을 텐데."


"제비꽃은 뭐 먹었어?"


"아무것도 안 먹었지."


핸드폰을 들어 다시 사진을 봤다. 내가 휴지통 앞에서 입 닦는 모습이 디스패치 샷처럼 보였다. 울면서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닌 척했는데, 편의점에서 도시락 먹고 유유자적하던 걸 다 보고 있던 거다.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소리 내서 웃자 제비꽃도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내가 더 크게 웃자 제비꽃도 따라 큰소리로 웃었다.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났다. 웃으면서 뺨으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무슨 시트콤도 이렇게 작위적이진 않겠네.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웃던 제비꽃이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열었다. 옷가지 사이에서 뭔가를 꺼냈다.


"류미야, 눈 감아봐."


순순히 눈을 감았다. 눈은 감았지만 머릿속에서는 온갖 시끄러운 생각들이 떠다녔다. 뭐지? 선물인가? 무슨 날도 아닌데? 근데 맘에 안 들면 어떡하지? 바꿔오라고 해야 하나? 선물은 좀 물어보고 사지 왜...


제비꽃이 내 뒤로 갔다. 뒤에서 감싸 안는 줄 알았는데, 목에 찬 기운이 느껴졌다. 제비꽃의 손이 목 뒤에서 뭔가를 채우고 있었다. 목걸이였다.


"뭐야? 목걸이야?"


눈을 번쩍 떴다. 식탁 위에 민트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티파니네? 웬일이야. 너무 예쁘다.“


우리가 싸울 줄 알고 미리 화해용으로 사왔나?


"류미야, 이제 결혼하자."


뭐?


"아..."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왜? 안될 거 같애?"


"아니 그게 아니고..."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프로포즈가 웬 말이야? 나랑 결혼을 하려고 생각했던 거야? 그런데 무엇보다, 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간절히 묻고 싶었다.


'프로포즈에 꽃이랑 다이아 반지랑 샤넬백이 없는 게 말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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