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37)
제비꽃은 나와 내내 함께 있다 일요일 밤 비행기를 타고 돌아갔다. 그렇다면 나와 진 대표의 일요일 일정은 어떻게 됐을까?
- 진 대표님, 제가 오늘 사정이 있어서 고양이 보러 못 가게 됐어요
- 꼭 가고 싶었는데... 죄송해요
일요일 아침, 그에게 카톡으로 못 간다고 통보했다. 속이 쓰렸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제비꽃을 섣불리 놓아버리기엔 위험 부담이 컸으니. 난 제비꽃과 결혼을 하고 싶지도, 안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가장 난감한 '애매한 상태'였다.
확실히 나는 진 대표에게 끌리고 있었다. 진 대표를 포기하는 건, 미래에 펼쳐질 꽃길을 애써 눈 감고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진 대표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거니와, 호감은 있는 것 같지만 나에 대한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MZ답게 결혼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잖아? 이 상황에서 그에게 올인할 정도로 나는 용감하지 않았다.
일요일 밤 제주공항, 제비꽃은 탑승수속 전 나를 꼭 껴안았다.
"류미, 일주일 있다 만나. 결혼은 부담 갖지 말고 잘 생각해 봐."
"응. 도착해서 연락해."
숙소에 돌아와 불도 안 켜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진 대표를 꼭 알아보고 싶은데, 제비꽃과 일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제비꽃에게 가야만 할까?
나는 불을 켜고 식탁에 앉았다. 종이를 한 장 꺼내 가운데 맨 위에서 아래로 세로줄을 그었다. 양쪽으로 나눈 종이에 쭉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비꽃의 장점>
스윗하다
세심하다
내 마음을 잘 알아준다
나밖에 모른다
노력한다
성실하다
진지하다
작은 선물을 자주 한다
<제비꽃의 단점>
예민하다
간혹 신경질적이다
속이 좁다
서운함을 참다가 급발진한다
유머코드 별로 안 맞음
눈물이 많다
실망을 잘한다
사람의 장점과 단점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연애 초반 그의 장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큰 단점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당연하다. 세심하면 소심하기 쉽고, 노력을 많이 하면 보상이 없을 경우 크게 실망하게 된다. 그의 순애보적 마음은 고지식함과 한 끗 차이였고, 매사에 진지함은 유머감각 결여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진 대표는?
<진 대표의 장점>
젊다
귀엽다
피지컬이 좋다
유머감각이 있다
능력 있다
진취적이다
귀여운 폭스바겐을 몰고 다닌다
<진 대표의 단점>
사기를 잘 당한다(?)
나는 그의 단점을 아직 알지 못한다. 이 상태로 그와의 가능성을 접을 수 있을까? 단점이 명백히 보이는 제비꽃과 달리, 그의 단점은 짐작만 할 뿐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단점이라도 확실히 알아야 포기할 텐데... 아쉬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왜 제비꽃은 여태 가만히 있다가 하필 지금 이러냐고! 그의 둥글고 인자한 이마에 딱밤을 놓고 싶었다. 나의 폭력성을 불러내다니, 제비꽃 단점 한 개 추가다. 내일 진 대표랑 저녁 먹으면서 깊은 얘기를 나눠봐야지. 아직 기회는 있을 것이니.
월요일 아침, 사무실로 출근했다. 이제 업무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진 대표는 오늘 외근인지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늦게 출근하나? 그러나 진 대표는 퇴근시간이 되도록 사무실에 오지 않았다. 왜 안 오지? 궁금했지만 사람들에게 그가 왜 출근을 안 하느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대표한테 왠 관심?'이라고 생각할 게 뻔하니.
직원들이 하나 둘 퇴근하고, 나도 퇴근 준비를 했다. 오늘은 택시 잡아서 집에 가야겠네. 그때, 출입문을 열고 진 대표가 들어왔다. 왔다 왔어. 저녁 먹으러 가서 얘기 좀 해보자.
그런데 진 대표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곧장 자기 캐비넷으로 갔다. 안에서 몇 가지 짐을 꺼내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갔다. 엥? 뭐야. 나를 못 봤나? 하지만 출입문을 들어서면 내 책상이 바로 보이기 때문에 그럴 리 없다. 진 대표가 설마 나를 피하나?
자리에 앉아 잠시 기다렸지만 진 대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카카오택시를 불러서 숙소로 귀가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한 진 대표는 내게 인사는커녕 눈길도 안 줬다. 내가 아무리 눈을 맞추려 해도, 그는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저녁 먹으러 가자고 묻지도 않았다. 월요일에는 조금 의아한 정도였지만, 화요일이 되니 확실히 감이 왔다.
'삐졌구나.'
내가 일요일에 약속을 캔슬해서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근데 저녁 같이 안 먹는 건 그렇다 쳐도, 인사조차 안 하면 본인이 더 민망하지 않나? 이렇게 대놓고 모른 척 하기 있어? 진짜 웃기네. 나는 진 대표의 단점 리스트에 '속이 좁음'을 적어 넣었다.
수요일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자, 나는 차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자책했다. 내가 일요일에 무리해서라도 갔어야 했어. 제비꽃을 어떻게든 따돌리고 갔어야 했어. 타이밍을 놓친 것이 명백했다.
목요일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시선은 컴퓨터에 고정시키고 있었지만, 곁눈질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녔다. 그는 내가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이쯤 되니 본질적인 의문이 생겼다.
'애초부터 내게 관심이 없던 게 아닐까?'
하지만 나도 할 말이 있다. 매일 저녁을 같이 먹고 숙소에 데려다줬잖아? 밤바다도 함께 보러 가고, 고양이도 보러 오라고 했고, 나더러 어려 보인다고 했고, 귀엽다고 했고(했었나?), 친구들한테 디저트 사주고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멀리서 온 파견 직원에 대한 배려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내게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하지 않은 이상, 모든 것이 내 망상일 소지가 있었다.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그래, 나이 든 아줌마가 꿈도 크지. 내 주제에 뭘. 나도 저렇게 속 좁고 태세 전환 빠른 사람은 사절이야.
퇴근 시간이 되어 짐을 챙겼다.
"류미 대리님."
진두준 대표였다.
"네?"
"저..."
아는 척을 하네? 갑자기 왜?
"혹시 저녁 같이 드실래요?"
이제서야? 며칠 동안 인사도 안 해놓고? 참내, 내가 그리 쉬워보이더냐.
"좋아요! 배가 너무너무 고팠는데 잘 됐네요. 얼른 가요."
나는 벌떡 일어났다. 거절하려고 했는데 마음이 1초 만에 사르르 녹아 있었다. 나야말로 태세 전환이 빠른가? 어쩌겠어. 원래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다.
사랑? 내가... 진두준 대표를 사랑하나?
우리는 회사 근처 해장국 집으로 갔다. 손님이 많지 않을 걸로 봐서 이름난 맛집은 아닌 것 같은데, 맛이 기가 막혔다.
"이모님, 여기 한라산 하나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운전 안 하려고?
"오늘은 못 데려다 드릴 것 같아요. 제가 술이 먹고 싶어서."
"좋아요. 저도 한 잔 생각나던 참이었어요."
우리는 소주를 한 잔씩 따랐다.
"짠!"
제비꽃이랑 겨울에 꼼장어에 소주 먹으러 갔던 날이 기억났다. 자기한테 오빠라고 안 부른다고 싸웠었지.
"대리님, 일요일에 왜 못 오셨어요?"
"아 그게... 제가 전날 친구들이랑 술을 너무 많이 마셨지 뭐예요? 숙취가 진짜 심했어요. 그래서 못 갔어요. 고양이 꼭 보고 싶었었는데..."
"그때 그 친구분들이요? 카페에서?"
"네 맞아요."
진 대표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혹시 토요일에 세화해변 가지 않으셨어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봤나 봐. 제주도 면적이 서울의 3배라는데, 그 넓은 제주도에서 어떻게 우리를 본 거야? 혹시 스토커?
"네 갔어요."
"어떤 남자분이랑 햄버거 드시던데. 밖에서 봤어요."
"네."
"남자친구예요?"
"...네."
"왜 얘기 안 했어요?"
"뭘요? 남자친구가 왔다고요?"
"아뇨. 남자친구가 있다고요."
아니… 네가 안 물어봤잖아. 물론 물어봤어도 뭐라고 대답했을진 모르겠다.
"..."
"저는 대리님이 남자친구가 있으신지 몰랐네요."
나는 갈등했다. 헤어졌다고 할까? 헤어질 거라고 할까? 아니면 '나도 너에게 호감이 있었다'고 말을 할까? 하지만 남자친구가 있는 입장에서 호감이 있었다고 말하면 나를 가벼운 여자로 보지 않을까? 내가 가벼운 여자라고 생각하면 내가 제비꽃이랑 헤어지고 오더라도 막상 나랑 사귀기 꺼려하지 않을까? 혹은 사귀더라도 나를 바람기 있는 여자로 생각해서 사사건건 참견하고 감시하지 않을까? 그럼 결혼까지는 못 가겠다고 하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나이 마흔다섯이 넘어서도 결혼 못하고 외롭게 살게 되지 않을까? 아 복잡해!!!
근데, 얘 되게 웃기네. 남친 있냐고 미리 물어보든가. 그리고 남자랑 있는 거 봤으면 바로 누구냐고 물어봐서 확인하면 되지, 왜 지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실망하고 삐져갖고 며칠 동안 인사도 안 하고 남의 맘 불편하게 하는데? 내가 영문도 모르고 그동안 얼마나 맘고생 했는지 알아? 화가 났다가, 자책했다가, 주눅 들었다가, 후회했다가의 연속이었단 말야.
"대표님, 저한테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보지 않으셨잖아요. 만약에 저한테 관심 있었으면 그것부터 물어보셨어야죠. 물어보지도 않는데 남자친구 있다고 말하면 이상하잖아요. 고백도 안 했는데 ‘나 좋아하지 마. 남친 있거든?'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 되지 않겠어요? 만약 나한테 호감이 있다면 확실히 표시했어야 해요. 그렇게 애매하게 다가오면 제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르잖아요. 안 그래요?"
혼냈네. 혼냈어. 조절하긴 했는데 좀 쎘나? 진 대표가 힘없이 웃었다.
"네, 대리님 말씀이 맞아요. 한 잔 받으세요."
나는 소주를 조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대리님한테 호감이 있던 게 맞아요. 그리고 그 정도 표현하면 알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야말로 대리님이 제 마음 알면서 모른 척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서운하기도 했고... 토요일에 남자랑 있는 거 보고, 일요일에 못 오신다고 연락받고 확신했어요. 나 혼자 설레발쳤구나."
그가 말을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어갔다.
"하지만 저는 남자친구 있는 여자는 절대 건들지 않아요. 대리님 남자친구 있는 거 알았다면 애초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을 거예요. "
왜 그래 젊은이. 난 제비꽃 정리할 생각도 있는데, 왜 갑자기 선을 그어? 이렇게 말하는 건… 내가 남친이 있어도 데려가고 싶을 만큼 탐나지는 않는다는 말이야?
"제주도에서 맨날 같은 사람들만 보다가 대리님이 오셔서 좋았어요. 외로웠었나 봐요. 아, 물론 외로워서 호감을 가졌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도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 대해, 우리의 관계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얼마 남지 남은 소주를 다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내가 다시 한번 운을 띄울 수도 있었지만, 자기 혼자 고백하고 정리하고 선 긋는 사람에게 ‘나도 너한테 관심 있어! 널 알아가고 싶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진 대표가 덥석 '나는 류미 대리님한테 완전히 빠졌어요. 우리 천생연분인 거 같으니 당장 결혼합시다' or '결혼을 전제로 사귑시다'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제비꽃이라는 카드를 버리는 게 겁이 났다. 내가 5살만 어렸어도 앞뒤 안 재고 뛰어드는 건데.
나이가 들면서, 손에 쥔 것을 함부로 놓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나는 카카오택시를 불렀다. 택시가 근처에 있었는지 금방 왔다. 진 대표가 뒷좌석 문을 잡고 허리를 굽혔다.
"대리님, 혹시... 그럴 리 없고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 혹시요. 남자친구 분이랑 잘 안 되면 연락 주세요. 서울에서 밥 한번 먹어요. 그땐 대리님이 저 맛집 데려가주세요."
그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택시 문을 닫았다.
이렇게 나의 제주도 파견 생활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