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38)
오후 2시. 나는 목포행 KTX 안에 있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이 뿌예졌다. 장마 시작이었다.
제비꽃과의 여행 시작점은 목포였다. 그가 하루 먼저 내려가는 바람에, 나는 KTX를 타고 홀로 목포에 가고 있었다. 오늘 저녁엔 파티원 2인이 추가될 예정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형제야. 어쩌다 둘 다 전라도에 자리 잡아서 한번 보기로 했거든. 류미한테도 꼭 소개해주고 싶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하룻밤을 보내는 게 불편했지만, ‘꼭’이라고 강조하는데 싫다고 할 수 있나. 제비꽃은 우리가 결혼할 거라고 단정했는지, 슬슬 지인들을 소개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프로포즈했다고 바로 결혼으로 직행이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하는데.
한숨이 나왔다. 이번 여행엔 걱정되는 포인트가 또 있었다. 우리는 목포에서 시작해 여수, 남해(사천), 통영을 찍고 서울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문제는, 제비꽃이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운전한다는 사실이었다.
"엄마가 차 빌려준대. 류미랑 안전하게 다니려고 운전 연습 많이 했어. 걱정 마."
걱정이 안 될 리가 있나. 면허 딴 지 얼마나 됐다고. 에휴 나도 모르겠다. 걱정을 해서 무얼 하리. 죽기밖에 더하겠어.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비를 보니 마음이 더 울적해졌다. 제주에서 3주 동안 뭘 한 걸까? 업무는 그렇다 쳐도, 개인적으론 몹시 아쉬운 시간이었다. 제주도를 떠나는 순간부터 진 대표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인생의 전환점이었을지도 모르는 순간에 내가 너무 방어적이었나? 본래 나는 불확실한 1억보다 확실한 1천만원을 택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베팅을 해봤어야 했나?
복잡한 마음으로 졸다가 깨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라 있었다.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으로 나갔다. 앞에 익숙한 인자한 실루엣이 보였다.
"류미! 우리 류미 잘 왔구나. 고생했어. 안 힘들었어?"
제비꽃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두 손으로 내 볼을 감쌌다. 손이 따뜻했다.
"응 괜찮았어. 근데 멀긴 멀다."
"그렇지? 얼른 들어가서 맛있는 거 먹자. 동생들이 회랑 치킨이랑 떡볶이 세팅해 놨어."
얼음장 같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제비꽃의 인자한 미소...는 아니고 회, 치킨, 떡볶이라는 아름다운 단어 때문이었다. 에어비앤비는 역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남자 둘이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오? 동생들이 생각보다 젊네?
“어서 오세요!"
“와 예쁘시다! 형 이렇게 예쁜 형수님을 왜 이제 소개시켜줘요."
기분 맞출 줄 아는 청년들이네. 이들의 등 뒤로 식탁이 보였다. 커다란 접시에 회가 빽빽하게 수놓아져 있고, 옆에는 후라이드와 양념 통닭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큰 그릇에 넉넉히 담긴 떡볶이와 순대도 먹음직스러웠다. 옆에는 다양한 주류 - 소주, 맥주, 청하, 막걸리, 조니워커 - 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들의 음식 셀렉과 립 서비스 모두 합격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도 너-무 뵙고 싶었는데, 호호. 이제야 뵙네요. 잘생겼어요 두 분 다. 호호."
제비꽃은 이들에 대해 딱히 말씀을 많이 한 적이 없다. 뭐, 듣기 좋으면 됐지. 옆에서 나를 쳐다보는 제비꽃의 눈빛은 모른 척했다.
"저는 방에 짐 놓고 손 씻고 올게요."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생각했다. 이왕 온 거 신나게 놀아야지.
형제는 유쾌했다. 나한테 수시로 농담을 걸었고, 그럼에도 선을 넘지 않았다. 사교 센스가 훌륭했다. 둘은 각각 나보다 1살, 3살 어리고, 둘 다 서울에서 로스쿨을 졸업해 형은 광주, 동생은 목포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중 형 변호사는 얼마 전 개인 사무소를 개업했다.
"형 변호사님은 어떤 사건을 주로 맡으세요?"
"이혼이랑 형사 사건이요. 돈이 되거든요. 특히 지방일수록 이런 일 아니면 돈 못 벌어요"
"아하. 그럼 근래에 맡은 사건 중 좀 자극적인 게 있나요?"
"다 자극적이에요. 상상도 못 할 일이 다 있어요."
"우와. 돈도 많이 벌고 신기한 케이스도 많이 보고. 얘깃거리도 엄청 많겠어요. 좋은 직업이네요.”
"그래 보이죠? 근데 생각보다 좋은 직업은 아닌 것 같아요. 돈이 되는 건 맞지만..."
형 변호사는 말을 흐렸다. 하긴, 허구한 날 이혼 소송에 누구 죽이고 때리고 이런 사건만 맡으면 싫긴 하겠다.
우리는 각종 주류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떠들썩하게 놀았다. 제비꽃과는 달리 이들은 나랑 음악취향도 맞고 유머 코드도 통했다. 우리 셋은 각자 좋아하는 음악을 번갈아가며 틀고 코멘트를 주고받았다. 음악을 들으며 대화가 되다니. 풍류를 아는 형제구먼?
어느 순간부터 제비꽃은 가만히 있고 우리끼리 떠들고 있었다. 혹시 기분이 상했나 싶어 곁눈질로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동생들과 내가 잘 지내니 흐뭇한 것 같았다.
어느새 밤 12시였다. 오후 6시도 안 돼서 시작했는데 꽤 오래 마셨네. 술을 섞어 마셔서인지 머리가 아팠다.
"난 먼저 잘게 얘들아. (말은 진작 놓았다) 너무 졸려서 안 되겠어. 내일 아침에 같이 해장하러 가자."
"네 누나 주무세요."
"내일 봐요 류미 누나."
귀여운 것들. 나는 방에 들어와 누웠다. 씻어야 되는데. 아 귀찮아. 잠시 후 제비꽃이 들어왔다.
"류미, 괜찮아? 많이 취했어?"
"많이 취한 건 아닌데, 섞어 마셔서 머리가 아프네. 나 먼저 잘게. 내일 해장국 먹으러 가면 딱이겠다."
"그래 류미야. 잘 자."
'잘 자'라고 말한 제비꽃은 나가지 않고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왜? 할 말 있어?"
"고마워 류미야."
"뭐가?"
"그냥. 전부 다."
"나야 차려준 음식이랑 술 먹고 논 거밖에 없는데 뭐. 나야말로 고맙지."
"아냐, 그래도 고마워."
"참내. 알았어. 얼른 나가서 놀아. 나 신경 쓰지 말구.“
"그래, 조금만 더 있다 들어올게. 자고 있어."
제비꽃이 방문을 닫고 나갔다. 착한 사람. 맨날 뭐가 고맙대. 나는 이불을 덮고 곧바로 기절했다.
“…지마! 그만 말하라고!”
큰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뭐지?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냐 이 새끼가!”
갑자기 튀어나온 욕설에 가슴이 철렁했다. 뭐지? 제비꽃인가?
“아니라니까! 내가 형을 왜 무시해! 오해야!”
“이 자식은 꼭 아닌 척하면서 나를 돌려 까. 그래서 할 말이 뭔데? 내가 못났다는 거야?”
“아니라니까! 아 형, 왜 그래. 제발 오해하지 마...”
다행히 제비꽃 목소리는 아니었다. 형제끼리 싸움이 붙은 모양이었다.
“이 자식은 예전부터 이랬어. 걱정한답시고 나를 개무시하고 어? 너나 잘해 너나!”
“아니라니까 진짜! 왜 이렇게 꼬였어 사람이!”
"뭐? 내가 꼬여?"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저것들 만취했네. 취하지 않고서야 아무리 형제라도 다른 사람들 있는데 저렇게 싸울 리 없다. 작작 좀 마시지.
귀를 막았지만 성량이 어찌나 큰지 다 들렸다. 추측하건대 동생 변호사가 형 변호사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형 이 폭발한 것 같았다. 별것도 아닌 거 같은데 왜들 그러나. 하긴 형제끼린 별 게 아닌 게 없다. 작은 갈등이 크게 폭발하는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쌓인 역사가 있어서지. 나도 친오빠가 있어서 안다. 징글징글한 인간.
“그래 나 꼬였다 어? 못나서 꼬였어! 니 말대로 나 꼬인 인생이라 남의 불륜이나 잡아내고 사기꾼 변호해주고 있다 왜!"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 형 정신 차려!"
나가서 말려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때,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컵이나 접시인 듯했다. 심각한데? 경찰 불러야 하나? 우리 제비꽃은 평화주의자라 전투력이 마이너스다. 제압 못할 텐데. 혹시 중간에 있다가 맞는 거 아냐? 내가 나가려고 일어나는 순간, 제비꽃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직하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싸울 일 있으면 다른 날 다른 데서 싸워. 술 취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니? 그리고 컵은 왜 던져? 정신 나갔어?"
"..."
"너희야말로 나 무시하니? 지금 내 손님도 와 계신데 술 마셨으면 곱게 먹고 자야지, 뭐 하는 짓이야."
“아 형 그게 아니고요..”
"너희 똑바로 해. 취했다고 다 용서되는 거 아냐."
"아 형 아니라니까요 진짜. 쟤가 먼저..."
“그만하고 일단 넌 나랑 나가. 바람 좀 쐬자.”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조용해졌다. 잠시 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흐흑… 허헝헝… 흑흑 끅끅... 저 꼬인 새끼 진짜 아오... 내가 연을 끊든지 해야지 미친놈 씨..."
방문을 살짝 열어 보니, 동생 변호사가 소파에 앉아 울고 있었다. 잘나가는 전문직들께서 왜 저런대. 할튼 배부른 것들이 더 앓는 소리 한다니까. 동생 변호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 있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잠들었네? 참내. 나는 문을 닫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제비꽃의 저런 단호한 모습은 처음 봤다. 저 난리통에 어쩜 저렇게 침착하지? 게다가 함께 언성을 높인 것도 아닌데 둘 다 깨갱하는 걸 보니 권위가 느껴졌다. 제비꽃, 내 앞에선 맨날 눈에 눈물 고이더니 생각보다 강하구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자고 내일 보자."
"네 형."
방문이 열리고 제비꽃이 들어왔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자는 척 했다.
제비꽃이 내 옆에 누웠다. 나는 실눈을 뜨고 곁눈질로 그를 쳐다봤다. 베란다에서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천장을 응시하던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울어 설마?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류미야."
나 안 자는 거 알았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역시 내 걱정 했구나. 늘 무슨 일이 있든 내 걱정이 앞서는구나... 찡해졌다.
“제비꽃…”
“드르렁~ 퓨우… 켁켁. 드르렁~”
순식간에 잠에 빠져든 제비꽃이었다. 신생아야? 코는 왜 저렇게 시끄럽게 골아. 아... 진짜.
아침이 되었다. 예상대로 변호사 형제는 인사만 까딱 하고 내 시선이 최대한 닿지 않게 돌아다녔다. 그러게 술 좀 작작 먹지. 남자 셋이서 설거지와 모든 청소를 마쳤다.
우리는 근처 해장국 집에 들어갔다. 해장술이니 뭐니 하면서 소주 한 병 시켰으면 안 참았을 텐데, 눈치가 있는지 해장국만 주문했다. 변호사 형제는 뚝배기에 코를 쳐박고 밥만 묵묵히 먹었다. 어제 그 재기 발랄한 남자들 어디 갔어? 그렇게 민망하면 사과하고 당당하게 밥을 먹든가. 에휴, 누나인 내가 손 내밀어야지.
"어제 둘 다 많이 취한 것 같던데. 취해서 그런 거 맞지?"
"네 저희가 좀..."
동생 변호사가 대답했다. 형 변호사는 여전히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이런 거 다 이해해. 그러니까 미안해하지도 말고, 민망해서 다음에 나 못 보겠다고도 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사실이었다. 대학 때 동기들이 미친 짓하는 걸 많이 보기도 했고 (지들끼리 싸우는 일은 양반이다) 오빠랑도 개싸움을 벌여본 적 있기에, 둘이 저러는 것도 이해가 됐다. 둘은 여전히 말없이 해장국을 먹었지만, 더 이상 뚝배기만 보지 않고 나랑 제비꽃이 하는 말에 웃기도 하고 나랑 눈을 맞추기도 했다.
이들과 헤어지고 제비꽃과 나는 차를 타고 다음 목적지로 떠났다. 이제 진짜 여행의 시작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제비꽃에게 물었다.
"어제 잘 해결했더라 제비꽃. 근데 들어와서 왜 울었어? 혹시 내가 걱정돼서 그랬어?"
"나 안 울었는데?"
"아냐 울었어. '미안하다 류미야...' 이러면서."
"류미가 잘못 본 거 아냐?"
"맞다니까.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몰라 기억 안 나. 그랬나 보지 뭐."
그랬다. 그도 만취 상태였다. 모두가 만취해서 싸우고 말리고 집 나가고 울고 그랬던 것이다. 나만 선명히 기억하는 여행 첫날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