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39)
목포를 떠나 순천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흐리더니 비가 오려 하고 있었다.
왜 우리는 휴가를 한반도 남쪽으로 떠났을까? 먼저 제안한 사람은 제비꽃이다. 아마 변호사 형제를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개판을 벌일 줄 알았다면 얼씬도 안 했겠지만.
내가 남쪽 여행에 흔쾌히 응한 이유는 순천만 때문이었다. 예전에 절친과 순천만에 온 적 있다. 때는 5월이었고, 갈대가 바람에 살랑대고 넓은 습지가 초록빛으로 덮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순천만을 떠날 무렵 산 너머로 지는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던 친구의 얼굴을 생생히 기억한다. 나중에 연인과 다시 와야지 결심했는데, 그중에서도 제비꽃과 오게 될 줄이야.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렸다. 잔뜩 흐린 하늘이 기어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기억 속 순천만은 기분 좋은 바람이 불고 햇볕이 찬란한 곳이었는데, 한여름 장마철의 순천만은 어두침침하고 쌀쌀했다.
"류미야, 따뜻한 커피 사서 갈까?"
"그래."
우리는 매점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사서 들고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발을 헛디뎌 커피를 손에 조금 쏟았다.
"으악! 뜨거 뜨거.“
"괜찮아? 뜨겁지. 화장실 가서 손 씻을래?"
"아 그정도는 아냐. 괜찮아."
나는 손을 흔들어 바닥에 탁탁 털었다.
"가만있어봐."
제비꽃이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뭔가 꺼냈다. 물티슈였다. 그가 커피를 바닥에 놓고 물티슈로 내 손을 닦아주었다. 그러더니 갈색 스타벅스 냅킨으로 물기를 흡수시켰다. 그는 늘 냅킨을 챙겨 넣고 다니다 내가 뭘 흘리면 꼼꼼히 닦아주었다.
"고마워."
“뭘.”
순천만 습지로 들어섰다. 비가 와서인지 관광객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우산을 쓰고 데크 길을 천천히 걸었다. 거의 10년 만에 오는데 데크 길도, 풍경도 변한 게 없었다. 마음속에서 고요히 기쁨이 올라왔다. 멀리서 봤을 때 뿌옇고 음산해 보였던 것과 달리, 막상 안갯속으로 들어와 걸으니 운치 있었다. 제비꽃이 말했다.
"이렇게 나오니까 좋다, 그치? 같이 살면 자주 여행할 수 있어서 좋을 텐데."
"그러게. 근데 꼭 같이 살아야 여행 올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같이 살면 내킬 때마다 훌쩍 떠날 수 있잖아."
아하. 여기서 포인트는 '같이 살면'이구나. 즉흥적으로 훌쩍 뭐 하는 거 안 좋아하는 그가, 여행을 핑계로 결혼 의향을 넌지시 떠보고 있었다. 부담 갖지 말고 생각해 보라고 했으면서. 난 모른 척하고 말했다.
"흠. 그런가?"
우리는 습지 이곳저곳을 걸었다. 둘 다 말이 별로 없었다. 제비꽃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나는 제비꽃과 진 대표를 두고 갈등하고 있었다.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뀔 터였다. 제비꽃과 결혼하면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삶을 기대할 수 있었다. 대학원을 가봤으니 공부를 더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 것이고, 사업에도 관심 없어서 큰돈을 갖다 쓰지도 않을 것이다. 연봉이 높진 않아도 먹고살 만큼 벌고, 성실하고, 친구 별로 없고, 가정적이고 성실한 그와는 그럭저럭 살만 하겠지.
하지만 그런 지루한 삶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겁 많고 소심한 그는 모험 따위 질색하고, 나와 유머 코드도 맞지 않아서 농담 한번 잘못했다가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자고로 남편감은 성실하고 가정적인 사람이 최고라고들 하지만, 내가 꿈꾸는 결혼은 죽이 잘 맞는 상대와 늘 까르르까르르 웃는 생활이었다. 그와 살면 재미는 없을 것 같았다.
진 대표와 함께라면 정반대의 삶을 기대할 수 있었다. 모험을 즐기는 그와 즉흥적으로 재미난 일을 도모하고, 그의 재기 발랄한 농담에 깔깔대며 얼마나 즐거울까? 그리고 죽을 때까지 나보다 6살이 어리기 때문에, 내게 평생 (상대적으로) 젊은 감성을 충전해 주겠지. 늘 젊게 살고 싶은 내게 딱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업을 했다. 아빠를 보아서 알지만 사업은 곧 불안정한 삶을 뜻했다. 지금은 잘나가는 스타트업 대표라 해도 내실이 탄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많은 스타트업이 투자로 근근이 살아가고, 중간에 잘못되면 개털 되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잦은 술 약속에, 야근과 주말 출근도 일상일 것이다. 그리고 뼛속까지 서울 사람인 내가 제주도에서 살 수 있겠느냐고.
가장 중요한 건, 진 대표의 결혼 의향을 알지 못했다. 그는 내 머릿속에서 본인과 제비꽃이라는 남자가 결혼을 두고 싸우고 있다는 걸 알까? 파견 온 누나한테 약간 관심을 보였을 뿐인데, 그 누나가 본인과 결혼 생각까지 한다는 걸 알면 얼마나 소름 돋을까? 늙어가지고 주책 이라 하겠지. 조금 침울해졌다.
"류미야 잠깐만."
걷다 보니 운동화 끈이 풀린 모양이다. 제비꽃이 쭈그리고 앉아 내 운동화 끈을 묶었다. 리본을 한번 묶고, 풀릴까 봐 리본을 한번 더 묶었다. 발을 떼려고 하자, 이번엔 손을 다른 쪽 운동화로 옮겨 끈을 다시 튼튼하게 묶었다. 난 제비꽃의 이런 면이 좋았다. 엄마같이 세심하게 살피고, 혹여 불편함이 있을지, 위험하진 않을지 챙겨주는 모습. 아, 모르겠다. 이런 순간에 잘해주지 말란 말야.
데크를 따라 걷다 보니 산으로 가는 길이 나왔다. 지난번에도 이 얕은 산에 올라 전망대에서 경치를 구경했었다. 그 멋진 풍경을 다시 보고 싶었다.
"제비꽃, 여기 올라가 볼래?"
"그러자."
곧장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제비꽃이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차에서 내려서 한 번도 손을 잡지 않았네. 초겨울에 처음 만날 때부터 함께 있을 땐 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얼마 전부터 내 손을 잡지 않았다. 내색은 않았지만 내 마음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걸 느껴서였을까?
제비꽃의 손은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했다. 착한 사람. 많은 고민 없이 그를 선택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에겐 미안하지만, 극도로 신중해야 했다. 나는 결혼 상대를 선택할 때 모든 불안한 요소를 제거하고 싶었다. 재밌고, 물질적으로 부족하지 않고, 상대를 의심하지 않고, 자유롭고, 안정적이고, 긍정적이고, 내게 충실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내 마음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그를 조금 멀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얕은 산 정상에 도착했다.
“이야! 경치 좋다."
제비꽃이 탄성을 질렀다. 흐렸던 하늘이 점차 개고, 구름을 뚫고 햇빛이 가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먼 곳을 응시했다. 얼굴에 순도 100퍼센트의 평안함이 떠올라 있었다. 역시 나이가 들면 기분이 널뛰지 않고 고요히 관조할 줄 안다는 장점이 있다.
올라올 때 땅이 젖어 있어 신발에 진흙이 묻어 있었다. 털어내려고 허리를 굽혔을 때, 발 옆에 조그마한 게가 보였다.
"제비꽃, 이것 봐. 게가 여기까지 올라왔네."
"정말 그렇네. 너무 귀엽다. 넌 어쩌다 여기까지 올라왔니?"
제비꽃이 쭈그리고 앉아 게에게 말을 걸었다. 보조개가 볼에 움푹 파였다. 그에겐 나이에 걸맞지 않은 발랄함이 있었다. 지나가다 꽃을 보면 멈춰 서서 예쁘다고 감탄했고, 나무에서 노는 새를 보면 사진을 찍었다. 길에서 강아지를 만나면 말을 걸었다. 그는 무해한 사람이었다. 모든 존재에게 애정을 담아 말을 건네는.
늦은 오후가 되어 산을 내려왔다. 이제 날씨는 완전히 갰다. 기분도 상쾌하고 좋았다. 그런데 제비꽃의 표정이 갑자기 구겨졌다.
"왜 그래?"
제비꽃이 인상을 쓰고 앞에 가는 중년 남자를 바라봤다. 아저씨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맙소사, 대도시 길빵도 용서 못하는데 산에서 담배를 피우다니. 저거 불법인데. 하지만 아저씨를 불러 세워서 훈계할 수도 없고, 신고할 것도 아니니 모른 척이 상책이었다.
"개념 없네. 미친 새끼가.“
헛. 저런 쌍욕을? 아까 산 정상에서 작은 게한테 보여주던 상냥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아주 싹퉁머리가 없네."
네? 싹퉁머리요? 사람의 입으로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어디서 겁대가리 없어 담배를 피워. 쌍노무새끼가."
"담배가 급했나 보지 뭐."
"그래도 그렇지. 저걸 확 그냥."
그의 부정적인 기운이 오롯이 전해졌다. 나도 저 아저씨가 싫지만 왈가왈부하며 기분 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려가서 데크길을 걸으면 엄청 멋진 석양을 볼 수 있단 말야.
"아우 몰라. 저렇게 살다 죽게 냅둬."
"난 저런 새끼들이 제일 싫어. 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남한테 피해 주는 것들."
(이하 궁시렁궁시렁...)
듣고 있으려니 짜증이 났다. 즐거운 하산 길에 굳이 왜 저런 인간한테 집중하나? 주변 풍경이 얼마나 멋진데. 저 아저씨는 욕 먹어도 싸지만, 지금 욕을 실제로 듣고 있는 건 저 인간이 아닌 바로 나였다. 끝없이 툴툴대는 소리가 정말이지 듣기 불편했다. 그가 쏟아내는 부정적인 기운에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난 그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가서 얘기해. 담배 끄라고. 신고해 버린다고."
"아냐."
"왜? 빨리 가서 말해. 여기서 말해봐야 나밖에 못 듣는데 무슨 소용이야. 가서 똑바로 가르쳐주고 와."
"싫어. 나 싸움 못해서 안 돼. 처맞을지도 몰라."
그랬다. 세상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쓸 줄 아는 그는 아가리 파이터이기도 했다. 겁이 무지하게 많은. 누구에게나 무해한 건 맞구나...
제비꽃에게 살짝 기우나 했던 마음이 냉랭하게 식었다. 산을 거의 내려왔을 무렵, 예전에 봤던 그 노을이 눈앞에 나타났다. 똑같이 멋진 노을이었으나, 기분이 저조해져 쳐다보기도 싫었다. 뚱한 얼굴로 내려오는 나와 달리 한참 욕을 하고 기분이 풀린 제비꽃이 말했다.
“노을 봐봐. 와 너무 예쁘다!”
제비꽃이 멈춰 서서 사진을 연달아 찍었다. 그의 얼굴엔 다시 순도 100퍼센트의 평안함이 올라와 있었다.